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유량(幼亮). 홍주문(洪柱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만종(洪萬鍾)이고, 아버지는 생원 홍중화(洪重華)이며, 어머니는 심윤원(沈胤元)의 딸이다.
12세에 어버이를 잃고 열심히 공부하여 1710년(숙종 36) 사마시를 거쳐, 1714년 참봉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23년 설서·병조좌랑·문학을 거쳐, 1726년(영조 2) 정언·지평을 역임하였다.
1727년 수찬으로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부교리를 겸하였다. 이어서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으나 그 해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화를 입을 때 파면되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로안무사(北路安撫使) 윤헌주(尹憲柱)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공을 세우고 지제교·병조정랑을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동래부사로 발탁되었다가 1731년 교리·수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강계부사가 되었다. 공조와 형조의 참의를 거쳐 1735년 승지, 이듬해에는 대사간·판결사·무주부사 등을 역임하고, 1740년 우부승지에 이어 이듬해는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앞서 단종이 죽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시녀(侍女)의 충절을 기념, 민충사(愍忠祠)를 세워 제사하게 하였다. 군덕의 소홀함과 형벌이 고르지 못함을 누차 상소하여 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