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강계부사, 우부승지, 영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유량(幼亮)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85년(숙종 11)
사망 연도
1742년(영조 18)
본관
풍산(豊山,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주요 관직
교리|수찬|강계부사|우부승지|영월부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강계부사, 우부승지, 영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유량(幼亮). 홍주문(洪柱文)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만종(洪萬鍾)이고, 아버지는 생원 홍중화(洪重華)이며, 어머니는 심윤원(沈胤元)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2세에 어버이를 잃고 열심히 공부하여 1710년(숙종 36) 사마시를 거쳐, 1714년 참봉이 되었다. 1721년(경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23년 설서·병조좌랑·문학을 거쳐, 1726년(영조 2) 정언·지평을 역임하였다.

1727년 수찬으로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부교리를 겸하였다. 이어서 광주부윤(廣州府尹)이 되었으나 그 해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화를 입을 때 파면되었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북로안무사(北路安撫使) 윤헌주(尹憲柱)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공을 세우고 지제교·병조정랑을 거쳐,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동래부사로 발탁되었다가 1731년 교리·수찬을 역임하고, 이듬해 강계부사가 되었다. 공조와 형조의 참의를 거쳐 1735년 승지, 이듬해에는 대사간·판결사·무주부사 등을 역임하고, 1740년 우부승지에 이어 이듬해는 영월부사로 부임하였다.

이때 앞서 단종이 죽자 강물에 투신자살한 시녀(侍女)의 충절을 기념, 민충사(愍忠祠)를 세워 제사하게 하였다. 군덕의 소홀함과 형벌이 고르지 못함을 누차 상소하여 시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지수재집(知守齋集)』
『한국계항보(韓國系行譜)』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