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 임씨(林氏). 본관은 나주(羅州). 속명은 재수(在修). 경상남도 합천 출신. 8세에 이동광(李東光)으로부터 사서(四書)를 수업하였고, 13세에 가야산으로 출가하여 백련암 연응(蓮應)의 제자가 되었다.
1902년 사미계를 받았고, 1904년 수도차 금강산 순례에 나서 팔공산 동화사, 오대산 월정사, 양양 명주사, 설악산 오세암과 봉정암, 간성 건봉사, 금강산 유점사 등지를 거쳐 마하연(摩訶衍)에서 1년 동안 수행하였다.
1908년에 비구계를 받았고, 1919년 2월에 상경하여 백용성(白龍城)·한용운(韓龍雲) 등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지시를 받고, 파고다공원 3·1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4년 친일승 이회광(李晦光)이 은행에 저당한 해인사 토지 4,000여 두락을 17년 동안 연부상환하였는데, 당시 해인사 교무직을 맡고 있었다. 1926년 해인사 법당 앞의 석축 및 삼층석탑을 개축하였고, 조선불교유학생회의 잡지인 『금강저(金剛杵)』 간행을 후원하였다.
또한, 홍제암에 거처하며 사명당(四溟堂)의 구국충성을 주창하고 시조 『백로가』를 유포,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1929년 일본경찰에 붙잡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이 때 일본경찰이 홍제암의 사명비를 파괴하였다. 1946년 해인사 주지에 취임, 사명대사의 새 비를 건립하였고, 1949년 주지직에서 물러나 홍제암·숭산농장 등지에 머물렀다.
특히, 그는 일생 동안 서도에 정진하였는데, 포교의 일환으로 여겨 구순 노령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해인사 어귀 반석에 새긴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지장보살(地藏菩薩)·옥류동천(玉流洞天)·절승대(絶勝臺)·사자문(獅子門), 그리고 3기의 석주(石柱) 등은 그가 쓰고 새긴 것이다. 만년에 가끔 달마도를 그리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