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검찰일기는 1882년 이규원이 울릉도를 검찰한 내용과 왕복 여정에 대하여 기록한 일지이다. 필사본 1권이다. 검찰사 이규원은 울릉도를 검찰한 내용 및 고종에게 복명한 내용까지 서술하였다. 검찰일기는 크게 일기 부분과 계초본으로 나뉜다. 일기에는 매일 날씨, 특별한 기후 현상, 노정 및 도로 현황이 기록되어 있다. 또 만났던 사람들과 본인이 행한 내용도 모두 기록되어 있다. 고종에게 복명할 때 제출한 울릉도 내도와 울릉도 외도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일기는 당시 울릉도 전반에 대한 내용을 상세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다.
이규원 검찰사가 개인적으로 적은 일기로서 후손에게 전해진 일기이다. 이규원 검찰사가 고종에게 복명할 때 함께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울릉도 내도와 울릉도 외도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필사본 1권이다.
울릉도검찰일기는 1881년 울릉도 검찰사로 임명된 만은(晩隱) 이규원이 1882년 울릉도를 검찰하기 위해 서울을 출발하면서 울릉도를 검찰하고 서울로 돌아오기 까지의 모든 일정에 대한 기록을 한 일기이다. 이규원 검찰사는 고종 19년(1882: 광서8) 4월 7일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한 후 10일 정도 서울을 출발하여 4월 30일 울릉도에 도착한 후 육로와 해로로 답사하고 서울로 돌아와 6월 6일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 기간은 약 2개월 정도가 소요되었으나 현존하는 검찰일기는 하행길은 경북 순흥에 도착하는 것부터 시작되며, 상행길에는 성 밖에 도착한 것 까지 기록되어 있다.
검찰일기는 크게 일기부분과 계초본으로 나뉘며 일기에는 매일의 날씨, 특별한 기후현상, 서울에서 평해까지 또는 평해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노정에 대한 도로현황과 만났던 사람들, 그리고 본인이 행한 내용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울릉도를 검찰하면서 기록한 일기에서도 매일의 날씨, 지형에 대한 내용뿐만 아니라 울릉도에서 만난 사람과 그 사람들에 대한 기록, 울릉도의 현황뿐만 아니라 본인이 행하고, 보고, 느낀점까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그대로 알 수 있는 매우 소중한 자료이다.
이규원 검찰사는 서울을 출발하기 전 고종과의 독대에서 약속대로 울릉도를 검찰한 후 사람들이 거주할 만한 지역과 포구로 발달시킬 수 있는 지역을 열거하였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지역으로 화구로이며 분지지형인 나리동을 선택하였으며, 이 지역을 1,000여호나 되는 많은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였다. 이밖에 대황토구미(현 태하), 흑작지(현 현포), 천년포, 왜선창(현 천부리), 대·소저포(현 저동), 도방청(현 도동), 장작지(현 사동), 곡포(현 남양) 등을 땅이 비옥하여 밭이나 논으로 경영하기에 적당한 지역으로 천거하였다.
또한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포구로서 소황토구미(小黃土邱尾), 대황토구미(大黃土邱尾), 대풍소(待風所), 흑작지포(黑斫之浦), 천년포(千年浦), 왜선창(倭船艙), 대암포(大岩浦), 저전포(楮田浦), 저포(苧浦), 도방청(道方廳), 장작지(長斫之), 현포(玄浦), 곡포(谷浦), 통구미(桶邱尾) 등 14곳을 추천하였다. 그러나 포구로서 완전한 지역은 아니라는 단서를 붙였다.
검찰일기에서는 울릉도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식생으로 자단향(紫丹香), 오동나무(梧桐), 잣나무(柏子: 측백나무도 될 수 있으나 여기서는 섬잣나무로 간주), 동백(冬栢), 황백(黃柏), 뽕나무(桑木), 감나무(柹木), 후박나무(厚朴), 홰나무(槐木), 노송나무(檜木), 마가목(馬柯木), 노가목(老柯木), 박달나무(朴達木), 단풍나무(楓木), 닥나무(楮木), 모시풀(苧草), 산삼(山蔘), 맥문동(麥門冬), 황정(黃精), 전호(前胡), 현호색(玄胡索), 위령선(葳靈仙), 백합(百合), 멧두릅(獨活), 남성(南星), 속새(木賊), 관중(貫衆), 복분자(覆盆子), 머루(山葡萄), 봄보살풀(春菩), 이실(尼實), 선후도(獮猴桃)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동물로는 까마귀(烏鳥), 비둘기(鵓鴿), 매(鷹鸇), 슴새(霍鳥), 물소(水牛), 물개(海狗), 고양이(猫), 쥐(鼠), 지네(蜈蚣), 미역(甘藿), 전복(全鰒), 해삼(海蔘), 홍합(紅蛤) 등을 열거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자료로서 당시 울릉도에 머물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에 대한 기록과 불법적으로 머물면서 벌목을 하고 있던 일본인에 대한 기록도 있다. 이규원 검찰사가 울릉도를 검찰하면서 만났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130여명이며 만나지 못한 사람까지 합하면 약 170∼180명 정도가 된다. 이들은 대체로 배를 수선하기 위해 머물던 사람들, 해초나 해산물 채취를 위하여 머물던 사람들, 또는 약초를 캐기 위해 머물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일부는 다년간 거주하였던 사람들도 있었다. 출신지역을 고찰하면 전라남도 흥양 초도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당시 78명의 일본인들은 ‘대일본국 송도 규곡’이라는 표목까지 세워놓고 불법으로 벌목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이미 울릉도가 우리의 땅임을 알고 있었으나 민간차원에서는 불법적인 벌목이 공공연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는 하루라도 빨리 울릉도를 개척해야 한다는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원인의 하나를 제공하였다 할 수 있다.
당시에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울릉도 전체를 그린 외도(外圖)와 나리분지 주변을 그린 내도(內圖)가 현재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울릉도 검찰일기는 서울에서 구산포까지의 왕복여정과 울릉도에 대한 11박 12일간의 검찰내용을 수록하여 당시의 도로현황과 울릉도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더구나 검찰활동의 결과로 울릉도에 개척령이 내리게 되는 기초자료를 제공하였다는 점에서 울릉도검찰일기가 지니는 의의는 매우 높다 하겠다. 더구나 적절한 시기에 개척령과 함께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사람들을 거주하게 하였다는 것은 울릉도가 우리의 땅임을 일본에 확인시켜주는 결과를 갖게 하였다.
울릉도는 조선조 초기 우리의 국민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의해 울릉도 거주 주민을 모두 본토에 와서 살도록 하였고, 숙중대 이후 2년에 한번씩 수토관들이 수토를 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19세기 중엽이후 일본인들은 자꾸 울릉도에서 벌목을 해 왔다. 그러나 검찰사의 검찰활동을 계기로 울릉도에 개척령이 내리고 사람들이 공식적으로 살게 되면서 오늘의 울릉도가 형성되는 기초가 되었다. 따라서 1882년의 울릉도를 찾아볼 수 있는 유일의 자료로서 매우 중요한 일기라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