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황현의 본관은 장수(長壽),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이며, 세종대의 명상 황희(1363-1452)의 후손이다. 전라남도 광양 출신이며, 1885년(고종22)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였으나 시국의 혼란함을 개탄하고 구례에 은둔했다. 1910년 국권을 빼앗기자 통분하여 하룻밤에 절명시(絶命詩) 4편을 짓고 음독, 자결하였다.
황현의 초상화는 조선 말기 최고의 초상화가이자 1910년대 초반 항일투사들을 주로 그렸던 채용신(蔡龍臣:1850-1941)의 작품이다. 화폭 뒤에 적힌 ‘신해년 오월 상순에 금마에 있는 종2품 정산군수를 지낸 채용신이 초상을 임모하다(辛亥五月上澣金馬從二品行定山郡守蔡龍臣臨眞)’라는 제기(題記)에서 보듯이 1911년 5월 상순에 그린 작품이다. 황현은 1910년에 이미 자결하였으므로, 이 초상화는 그의 사후, 1909년 천연당이라는 사진관에서 찍은 55세 사진을 보고 그려내었다.
사진과 그림은 얼굴의 각도, 사팔 눈, 상반신의 자세, 손에 든 부채와 책 등이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사진과 그림은 보는 이에게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갓과 두루마기를 착용한 사진 속의 황현은 작고 마른 체구에, 포즈 역시 어색하며 전체적으로 옹색하고 답답하다. 이에 반해 초상화에서는 정자관에 학창의를 입고 의연하게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유학자로서의 풍도가 한껏 드러나 있다.
「황현 초상」은 실물 그대로 재현된 정자관의 형용, 마치 살아 있는 인물의 살갗 처럼 촉감적인 피부와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 나부낄 듯한 턱수염 묘사 등이 탁월하다. 더욱이 동그란 안경 너머 생각에 잠긴 듯 앞 쪽을 정시하는 시선과 비통함을 참는 듯 살짝 다문 입술은 압권으로서, 조선 말기 유복 초상화 중 단연 최고의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보존과학 분석과정 중 X선 촬영에서 얼굴과 신체, 탕건과 귀부분 등에 배채된 흔적이 드러났다. 이는 도포에 흰색을 칠하여 은은한 색이 앞으로 배어나오도록 연출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서책을 쥐고 있는 왼손의 손가락 부분을 여러 차례 수정한 흔적이 드러났는데, 이는 얼굴만큼이나 손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채용신이 얼마나 공력을 들였는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그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