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윤효전은 광해군의 왕권확립에 앞장섰던 인물로서,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영초(永初), 초명은 효선(孝先)이며, 호는 기천(沂川)이다. 1605년(선조38)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임해군(臨海君 : 1574-1609)을 제거할 때 사헌부 집의로서 제일 먼저 임해군을 탄핵한 공으로 익사(翼社)공신 1등에 녹훈(1613년)되고, 형조판서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익사공신훈이 삭훈(削勳)되고, 품계도 낮아졌다가 1629년(인조7)에 아들 윤휴(1617-1680)의 상소로 복관(復官)되었다.
이 초상화는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공수자세를 취하고 앉아 있는 전신교의좌상이다. 얼굴은 반우향(半右向)하여 좌안7분면을 취하고 있으며, 사모는 모정(帽頂)이 낮고 양각(兩脚)은 넓고 길이는 짧다. 안면은 살색을 주조로 하고 가는 적갈색 필선으로 간결하게 윤곽과 이목구비를 형용하였으며, 오목한 부분을 적갈색으로 약간 어둡게 표현하였다. 가슴에는 두 마리의 공작과 모란문양의 흉배를 달고 있으며, 허리에는 서대(犀帶 : 코뿔소의 뿔로 띠돈을 한 각대로, 세자의 공복과 정1품의 관복에 착용케 함) 를 두르고 있어, 이 초상화의 주인공의 품계가 정1품임을 말해준다. 그런데 익사공신책록 때 윤효전의 품계는 2품이었으므로, 이 초상화는 익사공신 책훈 당시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 어렵다. 또한 익사공신호는 1623년 인조반정 때 삭훈되었으므로, 공신상 역시 일단 조정에서 회수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현재 전해오는 초상화는 익사공신호 책록 때의 공신상으로 보기 어려우며, 아마도 1629년 복관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다시 제작하면서 윤효전이 영의정(정1품)으로 추증(1619년)된 적이 있었으므로, 공작흉배와 서대를 착용한 모습으로 그려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은 비록 윤효전의 익사공신 책록 당시의 공신상은 아니지만, 간결한 안면묘사, 화려한 흉배와 채전의 형용, 그리고 흑자색 단령의 장중한 색감 등은 17세기 관복본 초상화가 지닌 독특한 미감을 유감없이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