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1724년에 신녕현(新寧縣) 보현산(普賢山) 법화사(法華寺)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로, 현재 영천 봉림사에 소장되어 있다.
영산회상도는 석가모니불이 인도의 기사굴산[靈鷲山]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불화이다.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많은 성중이 둘러싸고 설법을 듣는 장면은 조선시대 유행한 영산회상도 중에서도 짜임새 있는 구성과 대화면의 장중한 표현으로 단연 독보적인 작품성을 보여준다. 봉림사 영산회상도는 적색과 녹색을 주조색으로 원색조의 안료를 사용하여 밝고 경쾌한 화면이 특징적이다.
당시 시주질과 불화 제작에 관여한 명단은 발원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불화 조성의 수화승은 쾌민(快旻)으로 화기에는 쾌민, 체준(體俊), 덕종(德宗), 새정(璽淨), 지성(智性), 선월(禪月) 등 6명의 화승이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쾌민은 1708년에 조성된 보경사 괘불탱(보물, 2009년 지정)에 이름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 불화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 활동한 팔공산화파의 의균을 수화승으로 석민(碩敏), 성익(性益)·지붕(智朋)·체환(體環)·쾌민(快敏)·삼학(三學) 등 7명이 조성하였다. 이들은 동화사, 파계사를 주축으로 하는 팔공산 지역의 대표적인 화승이다. 쾌민이 의균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불사에 참여한 사례는 1725년 조성된 지장사 지장보살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장사 지장보살도는 석민을 수화승으로 쾌민, 체환, 체준, 굉원(宏遠), 법징(法澄), 새정, 지성(智性) 등이 그렸다. 쾌민의 불화에서 간취되는 밝고 명랑한 색채와 세선을 사용한 인물묘사는 팔공산화파의 18세기 양식을 보여준다. 이 불화를 통해 의균의 양식적 특징이 석민을 통해 쾌민에게로 계승되는 과정을 추측할 수 있다. 쾌민이 불사의 우두머리로 이름이 기재된 사례는 1724년 파계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중수에서 찾을 수 있다. 이후 1728년 동화사 지장보살도, 동화사 삼장보살도 조성에도 수화승으로 불화를 조성하였다.
화기에 의하면 봉림사 영산회상도의 조성은 3인의 대시주자에 의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시주자는 불굴사(佛屈寺)종밀(宗密)로 바탕과 불사에 수요되는 공양(供養)을 시주했으며 최후종(崔厚種)은 채색 안료를, 당시 법화사 승려였던 신오(信悟)는 배접에 사용할 종이를 시주하였다.
제작에 관련한 더 상세한 정보는 불화와 함께 발견된 복장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복장물은 발원 내용을 수록한 발원문(發願文) 1매와 당시 사찰 소속 승려들을 기록한 본사질(本寺秩) 2매, 시주에 참여한 명단인 시주질(施主秩) 1매, 그리고 목조 후령통과 복장주머니[腹藏囊] 1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봉림사 영산회상도는 18세기 경북지역에 있어 의균 이후 팔공산화파의 불화 제작과 양식적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