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쳐 활동한 불화승으로, 경상북도 팔공산(八公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생몰년을 알 수 있는 기록이나 어느 스승을 통해 화업(畵業)을 익혔는지 사승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남아있는 불화 작품과 문헌 기록을 통해 그가 17세기 중엽 경 출생하여 18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에 팔공산 지역을 중심으로 불화를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의균은 팔공산화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화승이다. 동화사 금당암의 극락전 중건, 수마제전 건립, 파계사 원통전 불사(佛事) 등 팔공산 지역의 재건 불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시기에 활동하면서 팔공산화파의 기틀을 다졌다. 1699년 동화사 아미타불회도, 1703년 동화사 아미타불회도, 1705년 서흥암 제석천도, 1707년 파계사 영산회상도(보물, 1995년 지정)와 삼장보살도, 1708년 포항 보경사 괘불탱(보물, 2009년 지정) 등이 전한다. 이 불화들은 그가 수화승으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이후에 그린 것으로, 이른 작례인 1699년 동화사 아미타불회도에서 이미 ‘대화원(大畵員)’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이 불화를 그린 4년 후인 1703년에 또 다시 동화사의 아미타불회도를 그리는데 금당의 벽면에 맞게 세 폭 형식으로 그렸던 형식 대신 한 폭의 화면에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여섯 보살이 에워싸고 있는 간결한 구성을 구현하였다.
또 그의 현존하는 작품 중 파계사 불화가 주목된다. 1806년 김희순(金羲淳)에 의해 작성된 「영조대왕원당사적(英宗大王願堂事跡)」에는 숙종(肅宗)과 파계사 영원(靈源)선사와 관련된 설화가 전한다. 숙종은 세 명의 왕비로부터 후손을 얻지 못하자 영원선사에게 왕자의 탄생을 빌도록 하였고 그의 백일기도는 영험이 있어 이듬해 영조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의균은 파계사가 왕실 후원을 받아 원당 사찰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던 시기에 초빙되어 주전각의 후불화를 조성하였다. 삼장보살도는 도난되고 영산회상도만이 현존하는데, 영원선사는 이 불화의 시주자를 모연하는 화주(化主)의 역할을 맡았으며 불화 제작에는 직접 증명(證明)으로 참여하였다. 불화의 화기와는 별도로 석가모니불의 대좌 중앙에 왕실 축원 문구와 ‘시주대군갑술생이씨(施主大君甲戌生李氏), ‘서씨양주보체수천추(徐氏兩主保體壽千秋)’, ‘경술생최씨보체수장명(庚戌生催氏保體壽長命)’이라는 명문이 있다. 시주자로 기입된 대군 갑술생 이씨는 1694년에 탄생한 연잉군(延仍君)이며, 경술생 최씨는 영조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1670~1718)이다. 대군에 이어 기입된 서씨는 후에 정성왕후(貞聖王后)가 되는 영조의 비이다. 불화가 조성되던 해 연잉군이 13세의 나이였던 것을 고려해보면, 실질적인 후원자는 숙빈 최씨이거나 혹은 영조의 정빈을 배출한 달성 서씨 가문으로 볼 수 있다. 숙빈 최씨에 이어 정성왕후 역시 파계사를 왕실 원찰로 삼았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시주자로 등장한 이 불화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불화에서 의균은 공간감을 강조하던 원형 구도 대신 등장 인물간의 위계를 강조하는 구성을 채택하였다. 화면 전체에 청화와 금채 안료를 많이 사용하여 의균의 다른 불화와는 차별되는 양식적인 특징을 볼 수 있다.
한편 1708년 보경사 괘불탱에서 의균은 ‘명현석덕(明賢碩德)’이라는 존칭으로 기록되었으며, 석민(碩敏), 성익(性益), 지명(智明), 체환(體環), 쾌민(快敏), 삼학(三學) 등의 화승이 참여하였다. 이후 의균은 제자들이 불화를 조성할 때 공양주(供養主), 화주, 시주(施主)의 소임을 맡았다. 1725년 제자 석민이 그린 지장사 지장보살도에서 의균은 공양주를 맡았다. 이미 화승으로는 은퇴했으나 제자들의 작업을 감수하고 감독하며, 불사의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 화승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1728년 동화사에서는 3년간 걸쳐서 계속된 대웅전 재건 불사를 마치고 영산회상도, 삼장보살도, 제석천도, 명부회도, 감로왕도, 사천왕도 등의 불화를 제작하는 대형 불사가 있었다. 대웅전의 삼단탱(三壇幀)과 향로전과 승당(僧堂) 봉안용 달마도를 비롯하여 인근 암자에서 요청한 제석도 등이 새로 조성되었다. 당시 동화사의 불화 뿐 아니라 경주, 창녕, 청도 등 인근 지역의 불화를 함께 조성하기 위해 동화사, 부인사, 북지장사, 파계사, 남지장사 등 팔공산 지역의 사찰 이외에도 영천, 청도, 경주 등지의 30개가 넘는 사찰의 승려 100여 명이 시주자로 참여하였다.
의균은 화주 및 대시주자로 승려와 신도를 모연하고 시주를 권면하는 역할을 맡았다. 동화사 대웅전 삼장보살도의 화기에는 의균을 ‘본사공양보시대시주(本寺供養布施大施主)’로 기입하여 그가 동화사 출신의 승려이며 대시주자임을 강조하였다. 당시의 많은 불화는 쾌민, 체환, 체준(體俊), 굉원(宏遠), 법징, 새정, 지성 등 7명의 화승이 그렸다. 이들은 팔공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균의 제자들로, 의균을 필두로 하는 이들 화파의 특징은 17세기에서 18세기로 이어지는 경상북도 지역 불화 양식이 한 단면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