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와 출신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서균한(徐均漢)은 최씨무인정권(崔氏武人政權) 시대 군인(軍人)으로 입신(立身)하여 1258년(고종 45) 초반에 야별초지유(夜別抄指諭)·견룡행수(牽龍行首)에 이르렀다. 『고려사(高麗史)』 반역열전(叛逆列傳) 김준전과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에 실려 있는 「상서도관첩(尙書都官貼)」의 내용을 통해서, 서균한은 야별초지유와 견룡행수를 겸직한 것으로 보인다.
1258년(고종 45) 3월 26일(丙子)에 별장(別將) 김준(金俊)과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이 중심이 되어 최씨무인정권을 붕괴시킨 무오정변(戊午政變)에 참여하였다. 무오정변은 최의정권(崔竩政權)의 정치·경제적 실정에 불만을 품은 여러 정치세력이 결집되어 제4대 집권자인 최의를 죽이고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이룩했던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이때 서균한이 맡은 역할은 김준의 명을 받아 삼별초를 사청(射廳)에 불러 모으고, 거짓으로 “최의가 이미 죽었다”고 하여 삼별초를 결집시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공을 세운 결과, 같은 해 7월 차송우(車松祐) 등과 더불어 원종공신(原從功臣) 성격의 위사보좌공신(衛社輔佐功臣, 同力輔佐功臣)에 책봉되었다.
이후 김준정권기의 관력(官歷)은 알 수 없다. 1270년(원종 11) 5월 14일(癸丑) 무신집권자 임유무(林惟茂)가 피살된 후 개경환도(開京還都)가 결정되고 삼별초가 해산되는 와중에서 7월 1일(己亥) 상장군(上將軍)으로서 고려에 주둔해 있던 몽골의 제왕(諸王) 쿠림치[頭輦哥, 忽林赤]의 명령을 받아 강화창(江華倉)을 열어 곡식을 군신(群臣)과 백성들에게 나눠주었다.
1258년 7월 위사보좌공신 19인(혹은 20인)에 포함되었고, 1260년 6월 위사보좌공신 15인에 다시 책봉되어 포상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