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림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후기에, 감찰집의, 군부판서,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88년(우왕 14) 1월
본관
경주(慶州)
출생지
미상
주요 관직
감찰집의|군부판서|문하시중
관련 사건
홍건적 제2차 침입|신돈의 수원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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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후기에, 감찰집의, 군부판서,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경주(慶州). 조부는 이관(李琯). 밀직(密直) 이수득(李壽得)의 아들이다. 염흥방(廉興邦)의 의붓 형이며, 원주 목사(原州牧使) 서신(徐信)과 동서 간이다. 사위는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존성(李存性)과 평양윤(平壤尹) ·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를 지낸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상질(韓尙質)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공민왕∼우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 · 대호군(大護軍) · 좌상시(左常侍) · 군부판서(軍簿判書)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판삼사(判三司)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고위 문신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 紅頭賊)의 침입에 따라 복주(福州: 경상남도 안동시)로 피난한 국왕을 호종한 공적을 인정받아 1363년(공민왕 12) 윤3월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護從一等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364년 5월 중국 강소(江浙: 강소성과 절강성)지역에서 원(元)나라에 저항하며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던 장사성(張士誠)을 접견하려 고려측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371년 7월 신돈(辛旽)이 수원(水原)으로 유배될 때 왕안덕(王安德)과 함께 신돈을 호송하였다. 1373년 10월에는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재임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유배되었다.

이후 1375년(우왕 원년) 7월에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李仁任)에 의해 유배되었다. 1385년 2월 우왕이 해주(海州: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사냥할 때 최영(崔瑩)과 함께 호종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한편, 1381년 3월∼1384년 윤10월 개경(開京)의 십자가(十字街) 근처에 이궁(離宮)으로 수창궁(壽昌宮)을 다시 창건할 때 최영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로 활동하였다. 우왕 때에는 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실록편수(實錄編修)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388년(우왕 14) 정월 사전개혁(私田改革)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있던 우왕과 최영에 의해 전민(田民) 점탈의 표본으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문선(東文選)』
『목은문고(牧隱文藁)』 「한문경공묘지명병서(韓文敬公墓誌銘幷序)」
『고려묘지명집성』(김용선, 한림대학교 출판부,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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