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경주(慶州). 조부는 이관(李琯). 밀직(密直) 이수득(李壽得)의 아들이다. 염흥방(廉興邦)의 의붓 형이며, 원주 목사(原州牧使) 서신(徐信)과 동서 간이다. 사위는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성주이씨(星州李氏) 이존성(李存性)과 평양윤(平壤尹) · 예문춘추관태학사(藝文春秋館太學士)를 지낸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상질(韓尙質)이다.
공민왕∼우왕 때 감찰집의(監察執義) · 대호군(大護軍) · 좌상시(左常侍) · 군부판서(軍簿判書) ·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 판삼사(判三司) · 문하시중(門下侍中) 등을 역임한 고위 문신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 紅頭賊)의 침입에 따라 복주(福州: 경상남도 안동시)로 피난한 국왕을 호종한 공적을 인정받아 1363년(공민왕 12) 윤3월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護從一等功臣)으로 책봉되었다. 1364년 5월 중국 강소(江浙: 강소성과 절강성)지역에서 원(元)나라에 저항하며 독자적 세력을 구축했던 장사성(張士誠)을 접견하려 고려측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371년 7월 신돈(辛旽)이 수원(水原)으로 유배될 때 왕안덕(王安德)과 함께 신돈을 호송하였다. 1373년 10월에는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재임하면서 왜구의 침입을 막지 못한 죄로 유배되었다.
이후 1375년(우왕 원년) 7월에 정권을 장악한 이인임(李仁任)에 의해 유배되었다. 1385년 2월 우왕이 해주(海州: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에서 사냥할 때 최영(崔瑩)과 함께 호종하였으며, 같은 해 7월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한편, 1381년 3월∼1384년 윤10월 개경(開京)의 십자가(十字街) 근처에 이궁(離宮)으로 수창궁(壽昌宮)을 다시 창건할 때 최영 등과 함께 조성도감판사(造成都監判事)로 활동하였다. 우왕 때에는 임견미(林堅味)와 더불어 실록편수(實錄編修)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1388년(우왕 14) 정월 사전개혁(私田改革) 문제를 함께 인식하고 있던 우왕과 최영에 의해 전민(田民) 점탈의 표본으로 지목되어 옥에 갇혔다가 죽임을 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