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탕은 1919년 1921년까지 약 2년간 김규식을 중심으로 구성된 임시정부 주 파리 위원부 대표부로서 파리에서 활동하였다. 주로 통신국을 담당하고 외교 · 홍보를 통한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펼친 인물이다.
1918년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로 파견되어 이후 외교무대에서 활약하였다. 김규식, 여운홍과 함께 한국의 독립운동이 파리강화회의에서 승인을 받도록 하기 위하여 심혈을 기울였다. 김탕의 임무는 파리에서 개최된 세계 제 1차 대전 종전 평화회의에 해외 독립운동 단체 대표자로 참석하여 당시 한국이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을 폭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 대표단은 일본의 방해와 압력 때문에 프랑스의 집권층과는 관계를 갖기 어려웠다. 김탕 등의 주 파리대표부는 압박을 받고 있는 한민족에게 동정적인 관심을 가졌던 현지인들과 교분을 맺고 이들의 협조 받았다. 그러나 자기의 이해관계에만 급급했던 열강의 냉대와 일본의 방해로 처음 계획했던 목적은 이룰 수 없었다. 평화회의가 끝난 후, 이승만 대통령의 소환 명령을 받아 김탕 및 다른 파리 대표부들은 1919년 8월 8일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탕은 3월 20일 파리 교외의 고급 주택가 뇌이이(Neuilly)에 살고 있던 중국인 사회 운동가 리유잉의 집에 세를 들어, 다른 동료들과 함께 외교, 홍보 활동의 준비 작업을 시작했다. 4월 하순경에는 파리 제9구 샤또당 가(街)(rue de Châteaudun) 38번지에 사무실을 연 다음, 사서함, 전화, 텔렉스를 갖추고 본격적인 외교, 홍보 활동을 벌렸다. 특히 통신국을 담당했던 김탕은 언론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한국에서 전개되고 있는 일제의 압박과 폭력적인 사건을 계속해서 유럽 언론에 폭로하는 일을 맡았다.
지속적으로 1910년 8월 22일에 서울에서 체결된 한·일(韓日) 합병이 강제적이며 불법적인 조약임으로 취소해야 하며, 제국주의 탄압과 폭력 행위가 유럽에서 특히, 폴란드와 알자스 로렌 지역이 겪고 있는 고통과 한국이 겪고 있는 고통이 같다고 호소했다.
3·1운동이 일어나 4월 11일에는 상하이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 의정원은 4월 13일 파리에 있는 이 파리 위원부의 대표단이었던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 평화회의 대한민국 위원으로 임명하여 신임장을 보냈으며, 이로부터 김규식 및 그 밖의 파리대표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김탕이 속해 있는 파리 주재 위원부는 1919년 11월 19일 프랑스 쉬이프(Suippes)에 한인국민회를 결성하는 한편, 1920년 10월 3일 위원부 대표 황기환이 런던 주재 외교위원으로 임명된 뒤부터는 영국에 대한 외교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여 맥켄지(Mckengie, F. A.)의 협력으로 그해 10월 26일 대영제국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파리 강화회의 의장과 이사회 임원들에게 청원서 비망록 서간 발송하는 일을 김탕이 맡았다.
이와 같은 외교활동 외에도 선전 활동에 주력하여 Circulaire과 La Corée libre이란 정기간행물과 여러 책자를 프랑스어 또는 영어로 발간하여 프랑스 정부 기관, 언론 기관, 저명인사들에게 배부하였다. 김탕의 주관으로 1919년 4월 26일 <회람> 제1호가 나온 후, 그해 11월 29일자인 22호를 내고 정지되었다. 반면, La Corée libre은 1920년 5월에 시작하여 1921년 5월까지 전부 13호가 나왔는데, 총 10책, 총 350쪽에 달한다. 여기에는 한일합방 이후부터 1921년까지의 한국 사정, 임시정부의 활동, 외교사, 일본 및 한반도 주변 정세뿐만 아니라, 한국에 관한 불어 서적목록, 한국의 문화, 언어 등에 관한 기사들이 들어 있다.
파리에서 김탕의 활동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주 파리위원부는 임시정부가 성립되기도 전에 파견되어 임시정부 수립과 동시에 임무를 부여 받은 최초의 대한민국 해외 대표부였으므로, 이후에 진행되는 파리뿐만 아니라 유럽 각지에서의 독립활동에 도화선의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