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 주파리대표부 ( Paris)

외교
단체
일제강점기 파리를 거점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펼쳤던 대한민국 파리주재 임시정부(1919~1920).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일제강점기 파리를 거점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펼쳤던 대한민국 파리주재 임시정부(1919~1920).
개설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파리대표부 김규식 외 김탕 및 여운홍은 파리 제9구 샤또덩가 38번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대표부 청사를 세우고 독립을 위해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 1919년 3월 28일부터 1920년 4월까지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고 일제의 주권탄압과 폭력적 인권유린을 유럽세계에 알리기 위한 대 열강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주권탄압과 폭력적 인권유린을 유럽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그의 첫 번째 목적은 실패하였으나, 1921년까지 파리위원부는 통신국(通信局)을 병설하여 「자유대한(La Corée Libre)」·「한국의 독립(L’Indépendance de la Corée)」등을 한국어·영어·프랑스어로 발행하는 등 프랑스 및 유럽여론에 우리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설립목적

1919년 4월 13일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대표로 위임장을 받고 파리로 파견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 파리 대표부는 김규식을 중심으로 파리강화회의 의장에게 편지를 보내고 「자유대한」이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세미나를 여는 등 일제의 주권탄압과 폭력적 인권유린을 유럽세계에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다.

기능과 역할

이 위원부의 주된 임무는 파리 강화회의 의장과 이사회 임원들에게 대한민국의 영토회복과 독립을 위한 독립청원서를 발송하여 일제의 탄압과 폭력으로부터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일이다.

파리강화회의에서 수행할 12개 항목에 걸친 파리 대표부의 임무는 다음과 같다.

  1.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 출석한 각국 대표들을 면접하고 한국에 대한 동정과 지지를 얻을 것

  2. 파리에 비공식적으로 가 있는 유력한 인사를 면접할 것

  3. 일본 무단통치하의 한국의 정치·경제·교육 및 종교의 여러 가지 사정을 알릴 것

  4. 일본의 한국에 대한 야욕을 폭로할 것

  5. 일본의 몽골·시베리아·산동·양자강·복건성 지역과 태국·필리핀·남해 및 인도에 대한 야욕을 폭로할 것

  6. 한국은 극동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열쇠와 같은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지리적 및 전략적 이유를 들어 설명할 것

  7. 미국·영국·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유력하고 책임성 있는 신문기자들의 동정적인 협력을 얻어 한국독립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을 조성할 것

  8.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중국의 유력지를 통하여 전 세계에 한국사정을 알리고 세계의 정치가들, 그리고 전 세계 사람들 간에 한국에 동정적인 여론을 조성할 것

  9. 파리·런던·샌프란시스코·상해 등지에 홍보국을 설치하고 또 모든 다른 방법을 통하여 직접·간접으로 활약할 것. 세계의 정치가들과 외교지도자들, 그리고 각국 국민들 간의 여론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를 극동에 알릴 것

  10. 선전물·선전 작품·그림이 든 전단 등을 작성·반포할 것

  11. 왜 한국이 독립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며 한국 사람이 스스로 통치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할 것

  12. 평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에서 대표로 인정받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고, 한국해방에 대한 정식 청원서를 제출할 것 이 청원서는 자세하고 포괄적일 것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에 알리는 그 첫 번째 목적과 임무는 실패하였으나 강화회의(1919년 6월 28일 폐회)가 끝난 이후에도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김규식은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인쇄물을 발간하고 각국 대표들을 방문하여 돌리고 3·1운동(1919) 이래 한국국내의 상황을 알리고 아시아의 평화에서 조선의 독립이 중요함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6월 30일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 미국 대표단은 한국문제의 보고를 청취하였고, 7월 28일에는 프랑스 동양정치연구회에서 한국과 중국 양국 문제 연설회가 개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7월에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2차 인터내셔널회의인 만국사회당대회가 개최되자, 파리위원부에서는 이관용과 조소앙을 대표로 파견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안」을 제출하였다. 이 결의안은 참가한 25개국의 찬동을 얻어 통과되었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조소앙은 한국독립승인 결의안을 확정짓기 위하여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제2차 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에 참가하여 다시 「한국독립문제 실행요구안」을 제출하였다.

이 요구안은 각국 10개국 대표들은 이미 스위스에서 통과된 한국문제를 가지고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각자 국회에서 이를 통과시켜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역시 영국·벨기에 대표들의 찬동으로 요구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일제가 외국의 정치가를 매수하고 언론에는 집중적으로 선전 활동을 하여 일제의 한국지배를 ‘정당화’함으로써 구미인들에게 잘못된 한국관을 키워주고 있을 당시 파리위원부의 적극적인 외교활동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리 위원부는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를 취재하려온 각국의 신문기자들과 외교관들, 그리고 프랑스의 국회의원들과 교분을 갖고 8월 6일 외국기자클럽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에는 80여 명의 명사들이 초빙되었는데, 불어로 된 한국독립선언서와 조오지 드크록이 쓴 『가난하나 아름다운 한국』이라는 책자와 조그마한 한국 깃발이 기념품으로 배부되었다. 연회석상에서 김규식은 참석한 내빈에게 감사의 인사말을 한 후, 한국의 지리와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고 한국에는 평화가 없으며 한국인은 독립을 원한다는 요지로 연설을 하였다.

김규식에 이어 중국 북경대학교수인 이유영과 전 모스크바 시의회의장인 미노, 『뉴욕타임즈』의 셀돈, 프랑스의 시의원인 마린과 미국의 주간 잡지인 『하퍼즈』의 기본즈 기자 등이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한국의 주창에 찬동한다는 연설을 하였다. 연회를 무사히 마치고, 김규식은 여운홍과 함께 8월 8일 미국으로 향하였다.

강화회의(파리강화회의, 1919)가 종료된 직후부터 김규식은 여러 차례 이승만으로부터 함께 미주에서 활동할 것을 권유받았다. 김규식이 떠난 뒤 파리위원부는 이관용이 위원장대리가 되었고 황기환이 서기장이 되어 위원부의 업무를 계속하였다. 1920년 1월 8일 프랑스 인권 옹호회와의 공동주최로 파리위원부는 대연설회를 개최, 이를 계기로 15일 한국독립후원동지회가 프랑스인 33명과 중국인 등 외국인을 포함하여 모두 40여 명으로 발족하여 파리위원부를 지원하게 되었다.

현황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대표부 청사지였던 파리 제9구 샤또덩가 38번지 건물 정문 앞에는 2006년 3·1절을 맞아 세워진 현판과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원회가 있었다’라는 프랑스어 문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 위원부 청사 1919~1920’이라는 한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많은 기대를 걸었던 김규식 이하 김탕, 여운홍은 파리강화회의가 열리자 강화회의 석상에 「공고서」를 제출하였으나 열강들의 냉담함으로 한국 독립 문제를 상정시키지 못하였다. 회의에 상정되지는 못하였으나 「공고서」는 사본이 작성되어 별도의 비망록과 함께 동봉되어 각국의 원수들과 정부, 그리고 국회에 보내졌고, 각국의 정치가들과 신문사 및 주요 기관에 배포되어 한국민들의 주장을 널리 전파하였다. 이후 일제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한국문제는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고, 한국독립을 지원하자는 국제여론이 일어났다.

김규식의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는 그다지 큰 성과가 없었다고 볼 수 있겠으나, 무엇보다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계기로 한국독립문제를 국제문제로 부각시켰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회의 종료 후, 김규식을 비롯한 파리위원부는 파리를 비롯한 유럽 주요 도시에서 한국문제에 관한 강연회를 개최하고, 국제회의에 참가하여 한국독립의 지원을 유럽인들에게 호소하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임시정부 자료집』21―파리위원부―(국사편찬위원회 편, 국사편찬위원회,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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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 을유문화사, 1985)
『한민족독립운동사연구』(박영석, 일조각, 1982)
『민족운동총서』1∼10(민족운동총서편찬위원회편, 1980)
『민족운동총서』1∼10(민족운동총서편찬위원회편, 1980)
『독립운동사』1∼10-독립운동사자료집 1∼14·별집 1∼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0∼1978)
「주파리위원부의 유럽외교활동에 관한 연구」(정용대,『서암조항래교수화갑기념 한국사학논총』, 아세아문화사, 1992)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정책연구 ; 구미소와의 외교정책을 중심으로」(이현희,『한국사학』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활동」(신재홍,『사학연구』22, 한국사학회, 1973)
집필자
김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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