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규장각 의궤는 강화도 소재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던 조선왕실의 의궤이다.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대의 방화로 전각이 소실되었고 의궤를 비롯한 340여 권의 도서가 약탈되었다. 이후 1세기 가량 방치되어 있던 의궤는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에 의해 발견되어 지금은 영구임대 형식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이라는 점과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어 연구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외규장각(外奎章閣)은 1782년 2월 정조가 왕실 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강화도에 설치한 규장각이다. 정조는 외규장각이 설치되자 원래의 규장각을 내규장각(內奎章閣, 내각)이라 하고, 각각의 규장각에 서적을 나누어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른바 의궤는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을 줄여서 한 단어로 만든 것으로, 의식의 모범이 되는 책이란 뜻이다. 『국조오례의』가 국가와 왕실의 기본 의례를 규정한 의례서라면 의궤는 의례를 예법에 맞게 행하기 위한 전례를 기록한 책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왕실과 국가에서 의식과 행사를 개최한 후 준비, 실행 및 마무리까지 전 과정을 보고서 형식으로 기록한 책이다. →의궤
외규장각은 병인양요(1866년) 당시, 강화도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의 방화로 전각이 소실되었다. 5,000여 권 이상의 책이 함께 소실되었고, 의궤(儀軌)를 비롯한 340여 도서가 약탈되었다. 그렇게 약탈된 외규장각의궤는 거의 1세기가 다 되어가는 기간 동안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베르사유 분관 폐지 창고에 버려지다시피 방치되어 있었다. 더욱이 중국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1979년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고 있던 박병선이 비로소 외규장각의궤의 행적을 밝혀내어 이 사실을 한국에 알렸다.
박병선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의 도움을 받아 『조선조의 의궤』(1985)를 펴내 프랑스국립도서관의 의궤도서들의 서지사항을 제시하고 국내 기관에 수장된 의궤도서들과 비교하였다. 그리고 1989년에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의궤도서들에 대한 해제 작업을 더 발전시켜 『왕실의궤』 해제서를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아울러 프랑스어로 원고를 작성하여 이를 출판하고자 하였다.
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학계에 알리기 위한 작업이었다. 1980년부터 시작된 해제 작업은 10년이 걸려 1990년에 끝났다. 그러나 상업성이 없어 프랑스에서 출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1992년 서울대의 지원으로 불어판 해제서, 『Régles Protocolaires de la Cour Royale de la Corée des Li, 1392~1910』이 세상에 나왔다.
간행 기관은 서울대학교 규장각과 박병선이 일하고 있던 프랑스의 학술원에 해당하는 콜레주 드 프랑스 두 기관 공동 출판으로 하여 의궤도서의 중요성을 프랑스 석학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배려하였다.
1993년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이 TGV의 대한민국 고속철도 수주를 위해 방한하면서, 『휘경원원소도감의궤』 상 1권을 반환하며 프랑스 외규장각 도서의 전체 반환을 약속했지만, 양국이 합의점을 찾지 못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민간단체 에서는 서로 다른 방법으로 프랑스 정부에 계속해서 외규장각 도서의 환수를 요구해왔으며, 대한민국의 시민단체인 문화연대 주도로, 프랑스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여 패소하기도 하였다. 이후 2010년 11월, 대한민국의 서울에서 열린 서울 G20 정상회담에서 프랑스와의 정상 회담 이후 외규장각을 5년마다 갱신 대여하는 것으로 합의하였다.
2011년 4월 14일, 1차분으로 75권이 환수되었다. 2011년 5월 환수가 완료되어, 7월부터 그 중 일부를 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 공개하였다. 그러나 환수는 5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대여 방식으로 돌아왔다는 점에서 미완의 환수라는 점이 분명하다.
조선 왕실 의궤는 국립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지만, 그 소유권은 실제 프랑스가 갖고 있다.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조선의 상징적 문화유산인 의궤를 우리의 문화유산으로 등록할 수도 없다. 전시나 연구 등을 위해 의궤를 다른 기관에 대여하는 것 등도 프랑스 측의 승인을 받아야 할 판이다.
결국에 제국주의에 약탈당한 문화유산의 대표 격인 외규장각 의궤를 이 땅으로 가져오는 데는 성공했으나, 남은 과제 또한 엄존하는 셈이다. 외규장각 도서의 온전한 환수를 위해선 소유권을 한국정부가 가질 수 있는 추가적 조치와 협상이 요구된다.
조선왕조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이미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조선시대 기록문화의 꽃이다. 조선왕조 내내 의궤는 꾸준히 제작되어 예(禮)를 중시하는 유교문화권의 특징을 잘 보여줄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통치 철학 및 운영체계를 알게 하는 대단히 의미 있는 기록물이다.
외규장각 의궤는 세계적으로도 유래를 찾기 힘든 완벽한 기록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프랑스로부터 약탈당하고 최근에 반환된 외규장각 의궤는 대부분 국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御覽用)이라는 점과 국내외에 한 점밖에 없는 유일본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앞으로의 의궤 연구 및 활용에 있어 중요한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의궤는 왕의 열람을 위해 제작한 어람용과 여러 곳에 나누어 보관하기 위한 분상용(分上用)으로 구분되어 모두 5∼9부가 제작되었다. 어람용 의궤는 규장각에 보관하고, 분상용은 의정부, 춘추관, 예조 등 관련 부서와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 평창 오대산, 강화도 정족산 등의 사고로 보내졌다.
이처럼 의궤는 조선시대 기록 문화의 꽃이라고 할 수 있음과 동시에 예를 숭상하는 유교문화권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어 조선시대 국가의 통치철학 및 운영체제를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
유일본이자 가장 오래된 외규장각 의궤는 『풍정도감의궤(豊呈都監儀軌)』(1630년(인조8) 분상용, 유일본)이다. 인목대비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해서 인경궁에서 열린 잔치 행사를 기록한 의궤이다. 당시 후금과의 관계가 긴박하고 흉년이 들어 재정상태가 좋지 않았으나 인조는 자신의 반정을 합법적으로 인정해 준 대비에 대한 고마움으로 풍정(잔치)을 올렸다. 한 책만 남아있는 유일본으로 외규장각 의궤 중에서 그 제작 시기가 가장 빠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