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의 신탁통치 결정을 둘러싸고 미술계 최대 단체였던 조선미술가협회 내에서 논란이 일었다. 또 조선미술가협회 대표로서 고희동이 이승만의 비상국민회의에 참여한 사실에 대해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반발하여 정현웅ㆍ길진섭ㆍ김기창ㆍ김만형ㆍ이쾌대ㆍ윤희순ㆍ최재덕ㆍ김정수ㆍ조규봉을 비롯한 조선미술가협회 미술가 32명이 집단탈퇴하였다. 이들이 중심이 되어 1946년 2월 28일 서울신문사에서 조형예술동맹을 결성하였다. 결성대회에서 위원장으로 윤희순, 부위원장으로 길진섭이 선출되었다. 조선조형예술동맹은 회원이 89명에 이르는 대규모 조직으로 발전하였고, 회원들은 대부분 식민지 시대부터 활동한 중진급 미술가들이었다. 산하 부문단체로 독립미술협회ㆍ단구미술원ㆍ청아회ㆍ조선조각가협회ㆍ조선공예가협회를 두었다.
조선조형예술동맹은 결성 후 곧바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에 가입하였다. 1946년 11월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에 있던 또 다른 미술조직인 조선미술가동맹과 통합되어 조선미술동맹으로 재출범하였다.
1946년 5월 13일부터 18일까지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제1회 춘계소품전을 개최하였다. 이 전시회는 해방 이후 신작들로 이루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시회로 주목을 끌었다. 또 1946년 8월 20일부터 27일까지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조선미술가동맹, 조선조각가협회와 합동으로 해방기념문화대전람회 미술전을 개최하였다. 이러한 합동 전람회는 여러 문화단체의 통합을 꾀하는 당시 조선문화단체총연맹의 분위기를 따른 것이었다.
그 밖에 1946년 5월 기관지 『조형예술』제1호를 발간했다. 조선조형예술동맹은 「창간사」에서 “작품행동에서 빚어낸 이론과 이론적 근거가 있는 실천을 요구하는 것은 근대인이 자랑할 수 있는 문화창조의 윤리”라는 뜻에서 기관지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조선조형예술동맹은 해방 공간에서 고희동을 중심으로 한 조선미술가협회와 대립하는 가운데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위치에 있던 많은 미술가들을 포용했던 대중적인 미술조직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역시 조선문화단체총연맹 산하의 미술단체였던 조선미술가동맹이 진보적 미술운동의 이념을 뚜렷하게 내세웠던 점과 차이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