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 한국 화단을 주도하였던 동경의 한국 유학생들의 친목도모와 회원들의 작품발표를 위해 결성되었다. 동경의 한국 유학생들의 친목단체였던 조선미술학우회가 1933년 백우회(白牛會)로 명칭을 바꿨다. 1933년 당시 백우회의 주축을 이룬 미술가들은 주경(朱慶)ㆍ심형구(沈亨求)ㆍ이쾌대(李快大)ㆍ박영선(朴泳善)ㆍ최재덕(崔載德)ㆍ김만형(金晩炯) 등 제국미술학교 재학생들이었다. 이후 동경미술학교, 태평양미술학교ㆍ일본미술학교ㆍ문화학원에 다니던 유학생들도 참여하였다. 명칭을 바꿀 당시에는 서양화가들의 단체였는데 점차 전공분야도 수묵채색화ㆍ조각ㆍ자수와 나전칠기 같은 공예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백우회는 1938년 다시 이름을 재동경미술학생협회로 바꾸고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첫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일본 유학생 30여 명이 출품한 50여 점이 전시되었다. 1939년 제2회전부터는 졸업생들도 참여할 수 있도록 재동경미술협회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는데, 이 무렵 회원이 100여 명에 이르는 큰 단체로 성장하였다. 1936년 서화협회가 활동을 중단한 이후 미술단체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1940년 제3회전부터는 이전까지 사용했던 화신화랑이 비좁을 정도로 규모가 커져 총독부의 후원 아래 9월 총독부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하였다. 1943년 8월 제6회 전시회를 가진 후 일제 말기 혼란 속에서 활동이 중단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미술계에는 많은 서양화단체들이 결성되었다. 1930년 동경미술학교 동문들의 모임인 동미회(東美會)를 비롯하여 목일회(牧日會), 녹과회(綠果會)가 창립되었고 1940년대에도 태평양미술학교 동문들의 모임인 PAS, 신미술가협회 등이 잇달아 생겨났다. 이 가운데 재동경미술협회는 일본의 한국 유학생들 대부분이 참여하는 가장 규모가 큰 단체였다. 재동경미술협회가 대규모 전시회를 개최하던 당시는 서화협회가 해체되는 등 화단 활동이 어려웠던 식민지 말기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재동경미술협회는 화단의 세대교체를 이루어낼 새로운 작가들의 역량을 보여주는 단체로 주목을 받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