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출신, 일본어학교였던 ‘경성학당’ 중학부를 졸업 후 도일하여 23세에 ‘니혼대학’을 마쳤다. 소학부와 중학부, 전수과 등으로 편성되어 있던 경성학당은 전국 각지에 세워졌던 사립 일어학교 중 가장 대표적인 교육기관이었다. 1905년 7월에 ‘경성학당 졸업생’ 자격으로 탁지부의 지방 세무 시찰을 담당할 일본인 고문 보좌관의 통역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1907년 신문사에 입사하여 1918년까지 10년 남짓 『대한매일신보』와 그 지령을 승계한 『매일신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12년 3월에는 일본에서 도쿄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윤백남과 함께 극단 ‘문수성’을 창립하고, 『불여귀』를 번안·각색하여 창립 공연작으로 삼아 ‘원각사’ 무대에 올렸다. 이후 1922년 1월 윤백남이 조직한 ‘민중극단’에 참여하여 각본을 맡는 등 번안 및 각색자로서의 역할을 꾸준히 하였다. 1925년에는 ‘고려영화제작소’와 ‘백남프로덕션’의 주요 제작진을 중심으로 ‘계림영화협회’를 창립하고 첫 작품으로 「장한몽」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독립신문』에서 주필로 활동하다, 1947년 10월 사망하였다.
조중환의 작품은 대부분 1912년부터 1915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다. 1912년은 조중환이 극단을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연극 운동에 참여하던 시기였다. 도쿄에서 한국어 단행본으로 간행한 『불여귀』(1912)와 『매일신보』에 연재한 첫 번째 소설 『쌍옥루』(1912∼1913)가 성공적이었으며, 이것은 『장한몽』(1913)의 흥행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들은 소설로서 뿐만 아니라 신파극 공연으로도 대성공을 거뒀다. 이후 조중환은 『매일신보』에 『국의향』(1913), 『단장록』(1914), 『비봉담』(1914) 등을 연재하였으며, 1922년에는 윤백남이 조직한 ‘민중극단’에 참여하여 각본을 맡기도 하였다.
1925년 조중환은 자신이 창립한 ‘계림영화협회’에서 『장한몽』을 기획하여 1926년 3월 ‘단성사’에서 1주일 동안 상영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조중환은 소설, 연극뿐만 아니라 한국영화사 초창기의 제작사로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해방 후에는 1947년 5월 『독립신문』에 주필로 취임하면서 「해방전후」를 연재하였지만, 연재를 마치지 못하고 1947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