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높이 36㎝. 고성 장의사(藏義寺)에 있는 석조관음보살반가상은 보광전(普光殿) 내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다. 보살상과 대좌는 한 돌로, 희고 무른 재질의 불석으로 조성되었다. 보관 상태는 파손 없이 양호한 편이며, 불상 바닥에는 복장물을 넣기 위한 장방형의 복장공이 마련되었으나 내부는 비어있다. 2011년 4월 28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장의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장의사 석조관음보살상은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올린 반가좌를 하고 있다. 이 자세는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반가상 2점은 대좌 위에 앉아 왼쪽 다리는 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오른팔을 살짝 얼굴에 대듯이 깊은 사색에 감겨 있는 듯한 모습이다. 그러므로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라고도 불리며, 이 시기에는 미륵보살로 알려져 있다.
반가좌의 자세는 조선시대 불상에서도 보이는데 무위사 극락전 목조 아미타삼존불좌상을 보면 양측 협시인 지장보살, 관음보살은 서로 다리의 위치가 반대이지만 모두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다리는 왼쪽 다리 위에 완전히 올리지 않고 대좌 위에 다리를 올려놓아 삼국시대의 반가좌와는 차이가 있다. 또한 조선 후기 명부전 시왕상도 반가좌를 하고 있는데, 조선시대는 삼국시대와 같이 어떤 특정 도상을 위한 자세가 아니라 존상들의 보편적 자세로 정착되었다.
석조관음보살상은 기암괴석을 대좌로 삼아 그 위에 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으로 올려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였다. 두 손은 손 등을 위로 하여 나란히 내려놓았는데, 오른손은 다리 위에, 왼손은 대좌 위에 각각 두었다. 전체적인 모습이 보타낙가산에 앉아 있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크며, 작은 방형의 상반신에 비해 하반신의 비중도 크다. 머리에는 문양이 없는 원통형 보관을 쓰고, 보관 아래 머리카락은 여러 가락으로 나누어 모발을 세세히 표현하였다. 머리 정상에는 머리를 묶어 두 갈래로 나눈 보계가 있으며, 귀의 앞과 뒤로 흘러내린 보발은 귓불 아래에서 합쳐서 다시 어깨 위에서 세 가닥으로 나누어 흘러내린다.
방형의 얼굴은 턱이 빈약하며, 얼굴 측면으로부터 이어지는 긴 눈썹과 눈꼬리가 양측으로 치켜 올라간 눈, 콧등이 편평한 작은 코와 완만하면서 넓은 인중선, 크고 얇은 입술에는 미소가 있어 친근해 보이면서도 강렬하고 독특한 인상을 준다. 이 같은 얼굴 모습은 경산 환성사 명부전 석조지장보살좌상, 의성 수정사 명부전 석조지장보살좌상 등 17세기 후반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조각승 승호(勝浩)의 불상과 유사하다.
어깨는 좁고 매우 빈약한데 그 위에 입은 두꺼운 천의 자락이 왜소한 신체의 결함을 보완해주고 있다. 양 어깨 위에는 천의를 숄처럼 걸쳤으며, 양 가슴 측면으로 흘러내리는 천의 자락은 허리 뒤로 빼내었다. 다시 앞쪽 양 손목을 덮어 양측으로 허벅지 쪽으로 흘러내려 있다. 가슴 아래는 군의를 입고 그 위에 다시 짧은 요의를 입고 끈으로 묶었는데 요의의 자락을 끈 밖으로 접어 안쪽 면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상반신의 두꺼운 천의와 달리 하반신의 군의와 요의 종아리 아래 치견(侈絹) 장식은 단순하면서 평면적으로 표현되었다.
장의사 보살상은 18세기 초를 전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범어사 대성암 각해선림 석조불상과 전체적인 모습이 닮아 있으며, 표충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석조보살상과도 비교된다.
장의사 석조관음보살반가상은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인상 등이 17세기 후반에 활동한 승호의 특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승호파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목조상과 비교하면 단순하고 치졸해 보일 수 있으나, 이는 조선 후기 석조불상 자체의 기술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무른 재질의 불석은 옷자락을 두껍게 하거나 평면적으로 하여 파손의 위험을 줄여야 하기 때문이다. 크기가 작은데도 보타낙가산에 관음보살 특징을 잘 드러내며, 군의와 요의, 무릎 아래 장식인 치견 등도 회화적으로 잘 표현되었다.
관음 보살상이나 관음 관련 불화는 우리나라 해안선을 중심으로 분포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고성 장의사는 남해 바다와 인접해 있는데 이 불상을 통해 관음 관련 신앙들이 바다를 생계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무사안일을 기도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작은 불상이지만 당시 신앙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고, 18세기 초를 전후해 조성된 석조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