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북음악가는 성격상 월북양악인, 월북국악인, 월북대중음악인으로 나눌 수 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시기에 월북한 음악인들은 북한 음악의 선도집단이다. 이들은 휴전 이후 북한에서 작품 창작하거나 공연 활동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음악대학에서 음악전공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현대 북한 음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지방에서 출생한 후 일제강점기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해방공간에서 남한을 선택하지 않았던 음악인들과 남한에서 출생하기는 하였으나 주 활동무대가 북한지방이었으며, 1945년부터 1953년 사이에 남한으로 이주하지 않고 북한에 남아 활동했던 음악인들은 ‘재북음악인’에 해당한다.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 그리고 1950년대 초반에 활동했던 양악인들은 대체로 유복한 가정이나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 이념으로 설립된 신교육장에서 음악을 배웠다. 그리고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양의 나라에 유학을 하거나, 일본의 음악학원에서 유학했다가 귀국 후 본격적으로 음악활동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일제에 철저히 친일했던 음악인과 좌익 성향을 지녔던 음악인으로 나뉘며, 후자의 양악인들 대부분이 월북을 하였다.
월북양악인 중 작곡가로는 김순남과 안기영이 있으며, 이 외에 다수의 성악가와 피아니스트,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자들이 있었다.
김순남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일본 유학당시 일본 프롤레타리아음악동맹의 조직부장이었던 하라다로(原太郞)의 지도를 받으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접한 것으로 보인다. 8.15 해방 이후 「해방의 노래」 · 「인민항쟁가」 · 「농민가」등을 작곡했다.특히 「인민항쟁가」는 임화가 시를 쓰고 김순남이 곡을 붙인 것으로, 당시 국내외로 가장 인기를 모았으며, 해방가요의 결정판이자 혁명송가의 전형성을 이룬 작품이며, ‘민족의 보배’로 평가받았던 작품이다. 그리고 1947년에는 「인민항쟁가」를 작곡했다는 이유로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져 도피하다가 강장일 등과 함께 월북하였다. 북한에서는 해주음악전문학교 임시 작곡교수로 있으면서 한시형 · 장일남 등을 가르쳤다. 그리고 1948년 박은용의 독창회에서「산유화」 · 「진달래꽃」등 18곡을 발표했고 그해 8월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로 선출되었다.
6·25전쟁 이후「빨치산의 노래」 · 「인민유격대의 노래」 · 「승리의 깃발」 · 「개선행진곡」등 많은 곡을 작곡하였으며, 1951년 3월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과 작곡분과 · 평론분과 위원직을 맡았다. 또한 평양국립음악학교 작곡학부 학부장을 지내다 러시아를 방문하였으며, 소련 차이코프스키 명칭 모스크바음악원 작곡이론부에서 1952년부터 2년 동안 작곡과 교수인 하차투리안에게 사사하였다. 그러나 1953년 남로당 숙청작업에 맞물려 북한으로 소환당하여 비판을 받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을 뿐만 아니라 창작권리가 박탈된 채 함경남도 신포에서 생활하였다. 1960년경에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복권되어 함경남도 신포기업소에서 노동자생활을 하면서 창작활동을 다시 시작했고, 민요를 발굴하여 악보로 출판하기도 했다. 이때 작곡한 노래가「놀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이고 바이올린 협주곡「이른 봄」도 이때 작곡했다. 1970년경 폐결핵에 걸려 요양하다가 1983년 67세의 나이로 작고하였다.
충청남도 청양 에서 출생한 안기영은 성악을 전공하였으나, 해방기에 향토가극의 성격을 띠는 「콩쥐팥쥐」, 「견우직녀」, 「에밀레종」 등을 작곡하여 발표하였다. 해방 후 음악건설본부와 조선음악가동맹의 위원 등을 역임하고 「그리운 강남」과 「작별」 등을 작곡하였다. 1950년 6월 18일에 월북하여 작곡과 성악을 겸하였으나 주로 성악인으로 활동하였으며, 1980년에 81세로 죽기 직전까지 평양음악무용대학의 교수로 지냈다. 안기영은 그의 성악 경험을 바탕으로 『성악련습곡』을 집필하였으며, 「민족성악에 발성법을 어떻게 적용시킬것인가」, 「성악에서의 변성에 대하여」, 「조선민요의 음계적 고찰」등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또한 가요 「돌격대의 노래」, 「마누라의 기쁨」, 「강기슭에서」, 「너더리장」 등의 가요와 「아름다운 거리」, 「해바라기」 등의 동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시기에 월북한 국악인은 공기남, 박동실, 안기옥, 임소향, 정남희, 조상선이며, 당시 북한지역에서 활동했던 전라남도 장흥 출신의 최옥삼과 충청남도 아산 출신의 류대복은 재북국악인으로 분류된다. 재북국악인에는 이외에 북한의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출생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북한에 머물렀던 서도명창인 김관보, 김진명, 선우일선, 왕수복 등도 있다.
월북국악인 중 가장 먼저 월북한 인물은 안기옥으로, 월북시기는 1946년 6월 즈음이다. 이들의 월북 이유는 남한 사회에서 판소리광대에 대한 신분차별, 당시 전라남도 지방의 팽배했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 등으로 나타난다.
월북국악인들의 활동은 연주활동, 창작활동, 교육활동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월북국악인 대부분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성악연구회’를 중심으로 창극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이들은 국립예술극장 협률단에 입단하여 창극 「춘향전」, 「리순신장군」 등을 창작 공연하였으며, 민족기악음악을 창작, 연주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1952년에 설립된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학부에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북한의 어린 음악전공학생들에게 산조와 시나위, 판소리, 창극 등을 가르쳤다. 월북국악인들은 전후의 차세대 음악리더들이 성장하기 전까지 북한 민족음악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음악적으로도 이들은 일제강점기의 전통음악과 주체사상 확립 이후 변화된 음악을 잇는 중간 가교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재북국악인인 가야금의 명인 최옥삼은 여러 악기 연주에 능했던 인물로 보인다. 그는 가야금산조와 단소 연주곡, 그리고 대금독주곡 등을 창작하였는데, 그의 대금독주곡 「은하수」와 「구룡폭포를 찾아서」는 제6차와 7차 세계청년학생축제에서 금메달을 받았으며 1983년 제6차 아세아음악연단에 명곡으로 등록되어 세계에 널리 소개되기도 하였다. 류대복은 김진명과 합작하여 창극 「배뱅이굿」을 창작한 바가 있었는데, 1954년부터 국립고전예술극장의 작곡가로 활동하면서 민족관현악곡들인「민요조곡」과 「환영곡」, 그리고 사회주의현실을 반영한 해금독주곡인 「흥겨운 일터」등을 창작하였다.
이들 또한 음악대학의 교원을 맡아 후진 양성에 힘을 쏟기도 하였다. 최옥삼은 평양음악대학 민족음악학부의 겸임교원으로 있다가 1956년에 사망하였고, 류대복은 1958년부터 민족음악학부 기악강좌 교원을 맡아 해금 교수를 기본으로 가야금, 대금, 아쟁, 장고 등의 실기교육을 담당하였다. 또한 『해금교측본(1959)』과 『저대교측본』(미완성)을 비롯한 많은 교재곡들을 창작하여 다수의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월북음악인 중 월북국악인은 박동실을 제외하고 모두 1960년대를 전후로 숙청당하여 활동양상을 살펴 볼 수 없으며, 월북양악인 중 김순남은 1953년에 가장 먼저 숙청당하였다. 그러나 월북국악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있었던 우리나라와의 음악교류 이후 점차 복권되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월북국악인 중 안기옥은 1994년에, 그리고 박동실이 1999년에 다시 거론되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윤이상음악연구소에서 편찬된 『조선음악명인전』에 수록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정남희는 2005년에 탄생 100주년 기념 연주회가 평양에서 열린 것을 계기로 사후 복권된 것으로 보인다. 월북국악인의 작품 중 정남희와 최옥삼의 가야금산조는 연변민족음악인을 통해 남한에 전해져 현재 대학에서 최옥삼류 가야금산조와 정남희제 황병기류 가야금산조로 연주되고 있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시기에 월북한 음악인들은 북한 음악의 선도집단이다. 이들은 휴전 이후 북한에서 작품을 창작하거나 공연 활동에 참가했을 뿐만 아니라 평양음악대학에서 음악전공 학생들의 교육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현대 북한 음악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뿐만아니라 월북국악인들이 담당했던 창극 활동은 현대 북한의 혁명가극과 민족가극을 만들어 내는 창작의 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