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사(聖住寺) 영산전에는 석조로 조성된 25구의 불상이 남아 있는데 석가여래삼존상과 16구의 나한상(羅漢像) 그리고 각각 2구씩의 천부상(天部像), 동자상(童子像), 사자상(使者像)이 봉안되어 있다. 이 석조불상들은 2010년 3월 11일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고, 성주사에서 관리해오고 있다.
나한상에 대한 기록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삼국유사』 권3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를 보면, 강원도 오대산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에 오백나한화상(五百羅漢畵像)이 봉안된 내용이 있다. 『고려사』에도 923년(태조 6)에 윤질(尹質)이 오대 후량(後粱)에 사신으로 갔다 오면서 오백나한화상을 가져와서 신광사(神光寺)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 제작되어 조각상으로 봉안된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예컨대, 1118년(예종 13)에 송나라의 황제가 보내온 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을 안화사(安和寺)에 봉안하였다는 것과 함께 장안사(長安寺) 나한당의 16나한상, 복령사(福靈寺) 16나한소상(十六羅漢塑像), 묘광사(妙光寺) 16나한상, 금골산(金骨山) 서굴(西窟)의 16나한상, 단속사(斷俗寺) 석조 오백나한상, 석왕사(釋王寺) 석조 오백나한상 등의 사례들이 그것이다.
나한상의 조성은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지속되었다. 세조의 둘째 딸 의숙공주(懿淑公主)와 그의 남편 정현조(鄭顯租)가 발원한 상원사(上院寺) 목조문수동자상(木造文殊童子像)의 조성발원문에도 16나한상을 조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존하는 나한상을 보면, 통일신라시대 석굴암 석조 나한상, 고려시대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오백나한상, 조선 전기 남양주 흥국사 목조 16나한상, 강원도 영월 창령사지(蒼嶺寺址)에서 출토된 석조오백나한상, 1516년(중종 11)에 조성된 실상사(實相寺) 서진암(瑞眞庵) 석조나한상 등이 있는데, 이들을 제외하면 17세기 이후에 조성된 것이다.
대체로 석가여래삼존상과 16나한상, 천부상 등으로 구성되어 영산전(靈山殿), 나한전(羅漢殿), 응진전(應眞殿)에 봉안된다. 이 가운데 석가여래삼존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불로 알려져 있는데 과거와 미래형은 보살상으로 나타낸다. 과거의 존명은 제화갈라보살, 현재의 존명은 석가모니, 미래의 존명은 미륵보살이다. 제화갈라보살은 석가모니 전생에 수기를 준 부처로 연등불(Dipamkara), 정광불이라고 하는데, 제화갈라는 산스크리스트 이름을 음역한 것이다.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를 이어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의식집 『제반문(諸般文)』 「나한청(羅漢請)」 조에도 우보처 제화갈라와 좌보처 미륵보살이 나타났고, 완주 송광사 응진전 목조 석가여래좌상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에도 영산교주 석가모니와 좌우보처에 제화갈라와 미륵보살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불단 가운데에는 석가여래삼존상을 모시고 양측으로 각각 8구의 나한상, 1구씩의 천부, 동자, 사자상이 봉안되었다. 모두 불석(佛石)으로 조성되었지만, 그중 2구의 나한상은 목조로 제작되었다. 법의를 입은 모습은 비슷하나 얼굴, 신체 비례 등에서 차이를 보여 석조나한상을 모본하여 다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존상과 나한상의 밑바닥에는 넓은 복장공이 마련되었다.
영산전 불단 중앙에는 본존인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우측에 제화갈라보살과 좌측에 미륵보살이 봉안되었다. 우측 보살상은 머리에 두건을 쓰고, 좌측의 미륵보살은 보관을 쓰고 있다. 일반적으로 양측의 협시는 보관을 쓴 보살의 형태로 조성되지만, 서로 다른 모습과 두건을 쓴 것은 이례적이다.
삼존상의 특징은 동일한데 허리를 세우고 머리를 앞으로 약간 숙인 자세에 수인은 무릎 위에 놓은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오른손은 손등 위로 한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가 방형을 이루며 무릎이 높고, 측면도 매우 두껍다.
머리와 육계는 구분이 불분명하고 그 경계에는 큼직한 반원형의 중간 계주와 육계의 정상에는 정상 계주가 각각 있다. 얼굴 면이 넓고 눈과 입의 조각이 얕지만, 직사각형의 코는 오뚝하게 조각되었으며, 전체적으로 독특한 인상을 준다.
본존상은 대의로 오른쪽 어깨를 살짝 가린 변형 편단우견식으로 입었고, 양측의 협시상은 오른쪽 어깨에 편삼이라는 내의를 입어 그 위에 다시 변형 편단우견식으로 대의를 돌려 입었다. 가슴 아래에 수평으로 입은 승각기는 5개의 연잎형 옷 주름으로 모양을 내었는데, 각각 크기와 모양이 달라 조각 기술의 한계를 보인다. 결가부좌한 다리 사이에 펼쳐진 군의 자락은 양측이 서로 대칭되게 3조의 주름으로 나누어 펼쳐 놓았으며, 끝단은 둥글게 표현되었다. 왼손 아래 뾰족한 잎사귀 모양의 옷자락은 얇고 옷 주름 표현 없이 단순하게 조각되었다.
좌우 협시 보살상은 본존상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것을 제외하면 신체 비례, 얼굴 등의 특징이 동일하며, 나한상과 권속들도 비슷한 특징으로 같은 조각승에 의해 모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한상은 민머리형, 혹은 두건을 쓰고 있으며, 자세는 양손을 무릎 위에 얹어 결가부좌한 자세를 취하였다. 간혹 육모방망이나 경전과 염주 등을 지물로 들고 있거나 사자, 호랑이, 돼지 등을 안아 제압한 모습도 있다. 법의는 장삼 위에 대의를 걸치고 있으며, 왼쪽 어깨에는 대의를 고정한 원형의 금구 장식이 표현되기도 하였다. 천부상(天部像)은 머리에 보관을 쓰고 양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얹어 교의(交椅)에 앉아 있으며, 동자와 동녀는 손에 수박과 연봉을 지물로 쥐고 있다.
성주사 영산전 석가삼존십육나한상은 전체적인 모습이 포항 보경사 대웅전 석조불상(1679), 통영 용화사 보광전 석조불상, 군위 지보사 대웅전 석조불상, 의령 수도암 불상 등과 얼굴뿐 아니라 신체 비례, 법의, 손 등 전체적인 표현이 매우 유사하다. 특히 수도사 삼존상은 1786년(정조 10)에 개금 수리한 내용을 적은 개분기(改粉記)가 발견되었는데, 불상을 조성한 후 50~100년을 전후하여 수리되는 점을 감안하면 이 상들은 18세기 초를 전후하여 조성된 것이다.
불석으로 조성된 큰 규모의 작품으로, 신체 비례, 얼굴, 법의 등에서 조각승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특히 불석으로 제작된 석조불상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는데 그중에서도 규모라든지 조각승의 개성과 불석 불상의 기법이 잘 드러나 있어 조선 후기 석조불상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