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6년(명종 1)~1592(선조 25). 자는 중임(仲任)이고,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다가 1592년(선조 25) 8월에 금산전투에서 조헌(趙憲)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 아버지는 이우(李遇)이고 어머니는 담양 전씨 전수(田秀)의 딸이며, 부인은 진주 강씨 강성(姜晟)의 딸이다. 할아버지 이사원(李師瑗) 때부터 홍주에서 세거하였다. 조헌(趙憲), 오윤겸(吳允謙) 등과 교유하였다.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효행으로 추천되어 문소전(文昭殿) 참봉(參奉)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592년(선조 25) 조헌 등과 함께 금산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이광륜은 임진왜란 직후인 6월 이후에 홍주에서 인척과 가동(家僮) 등 3백여 명을 모아 의병을 조직하였다. 계속 패퇴하는 국왕을 호위하던 근왕병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광륜의 의병에는 동생인 이광복(李光輻)과 장자 이대준(李大濬)도 참여하였다. 이광륜이 이끄는 의병은 조헌이 이끄는 의병과 합세하였다. 합세한 의병군은 ‘의(義)’자로 씌여진 기를 앞세우고 각 부서를 나누어 정산(定山) 등지를 왕래하며 백성들의 인심을 안정시켰다. 1592년 8월에는 조헌 및 승려 영규(靈圭) 등과 청주로 진격하여 탈환하였다. 이어 다시 금산으로 진출하여 교전하다가 순절하였다.
임진왜란이 종식된 후 사헌부 집의에 추증되었고, 1603년(선조 36) 금산에 종용사(從容祠)가 세워져 조헌,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배향되었다. 1783년(정조 7)에는 6대손인 이병철(李秉喆)이 상소하여 『선묘보감(宣廟寶鑑)』에 이광륜의 성(姓)이 조(趙)로 표기된 것을 수정해주기를 요청하여 바로 잡았다. 1799년(정조 23) 충청도 유생 한제유(韓濟裕) 등이 증시(贈諡)를 요청하였고, 1802년(순조 2) 7월에 이조판서가 추증되었으며, 의헌(毅憲)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정려(旌閭)는 충청남도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에 세워졌고, 묘소는 홍성군 장곡면 옥계리 산 77번지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