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문백(文伯)이고, 호는 망와(忘窩)이며,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조선 후기 숙종대 후반부터 영조 연간까지 활동했던 관인(官人)이다.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으로 활동하였고, 학통상으로 허목을 계승하였다.
고조는 인조대 영의정을 지낸 이원익(李元翼)이고, 생부는 이상현(李象賢), 양부는 이증현(李曾賢)이다. 태종의 왕자인 익녕군(益寧君)의 후손이다. 초취(初娶)는 은진송씨 송도흥(宋道興)의 딸이고, 후취는 안동권씨 권석(權碩)의 딸이다.
1678년(숙종 4)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1694년(숙종 20) 의금부 도사를 비롯해 1699년(숙종 25) 장원서 별제, 1700년(숙종 26) 군자감 주부와 형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이후 형조정랑과 용궁현감, 청산현감, 평창군수 등을 지냈다. 경종대에는 세자익위사 위솔과 김제군수를 지냈고, 영조대에는 영의전 영(令)과 부호군을 지냈으며, 1732년(영조 9)에는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고 1739년(영조 15)에는 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다. 1744년(영조 20) 9월에는 정헌대부(正憲大夫)에 가자되었다.
이존도는 고조인 이원익 등을 이어 정치적으로 남인으로 활동하면서, 학통으로는 허목(許穆)을 계승하였다. 생부 이상현이 허목의 문인이기 때문이었다. 1709년(숙종 35) 10월에는 진주목사에 재직하던 조식(趙湜)이 진주(晉州)에서 간행한 『변무록(辨誣錄)』에서 선조인 이원익을 욕되게 하였다고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조식은 정시한(丁時翰)의 문인으로, 스승을 변론하기 위해『변무록』을 간행한 것이다. 당시 조경(趙絅)이 찬술한 이덕형(李德馨)의 신도비명에서 정시한의 선조인 정호관(丁好寬)이 광해군대에 폐모론(廢母論)을 발론하였다고 한 것으로 인해 논란이 있었다. 이 사안은 신도비명이 찬술되기 이전 이미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조경은 이를 그대로 비문에 수록한 것이다. 이를 두고 정시한 측과 조경 및 이덕형 후손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으나 끝내 시정되지 않았다. 이에 조식은 스승 정시한의 주장을 수록한 『변무록』을 간행한 것이다. 따라서 이존도의 상소는 선조인 이원익을 거론하고 있으나 결국에는 조경과 이덕형 가문의 입장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남인 내의 이 같은 갈등은 이후 숙종 말 경종 초에 남인이 문내파(門內派)와 문외파(門外派), 과성파(跨城派)로 나뉘게 된 전조였다. 이존도는 이후 1724년(경종 4)에는 이징구(李徵龜) 등과 연명으로 김성궁인(金姓宮人)의 색출을 요청하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김성궁인은 음식에 약을 타서 국왕인 경종을 시해하려고 했다고 소론들로부터 지목되던 궁인이었다. 경종 연간 소론과 남인 일부의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작품으로는 『전사통감(全史通鑑)』 60권과 『망와잡록(忘窩雜錄)』 4권이 있었으나 현재로는 『전사통감』 일부만이 전한다. 『전사통감』은 복희씨(伏羲氏)부터 원나라까지의 역사를 기술한 책이다.
그의 사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에 위치하였다가 1992년에 광명시 소하동 산137-1로 이장하였다. 광명시 소재 충현박물관에는 이존도의 영정이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