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택지(澤之)이고, 호는 용암(龍巖)·운암(雲巖)·지암(止庵) 등이며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경상북도 선산부 해평에서 은거하였으며, 박영(朴英)의 문인이다. 이황(李滉)과도 서신을 통해 학문적 교류를 하였으며, 생활면에서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입각한 생활을 하였다. 선조 연간에 정려(旌閭)가 하사되었다.
고려 때 도첨의 우정승을 지낸 박화(朴華)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박종원(朴宗元)이고 어머니는 김해 허씨 허양(許諒)의 딸이다. 초취(初娶)는 김백(金栢)의 딸이고 재취는 김헌(金王+獻)의 딸이다. 경상부 선산부 해평현에서 은거하였고, 박영의 문인으로, 송희규(宋希奎)·송순(宋純)·김취성(金就成)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문과 응시를 포기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평생 학문에 정진하면서 『격몽편(擊蒙編)』, 『자양심학지론(紫陽心學至論)』, 『경행록(景行錄)』, 『삼후전(三侯傳)』, 『위생방(衛生方)』등의 저술을 남겼다. 이 가운데 『격몽편』과 『자양심학지론』은 이황에게 산정(刪正)을 부탁하여 후일 문집에 수록되었다. 『격몽편』은 초학자의 성리학 입문서이고, 『자양심학지론』은 주희(朱熹)의 심학(心學)을 정리한 것이다. 평소의 생활은 『주자가례』에 준하였다. 상주가 되어서는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고, 삭망(朔望)의 전(奠)은 고조에까지 미쳤으며, 기일(忌日)에는 의관을 희게 하여 곡읍(哭泣)을 예법대로 하였다고 한다.
1580년(선조 13) 정려가 하사되었으며, 현재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괴곡리 고리실에 박운의 효자정려비가 세워졌다. 또한 1646년(인조 24)에 설립되어 1787년(정조 11)에 사액된 낙봉서원(洛峰書院)에 배향되었다. 낙봉서원에는 박운 이외에도 김숙자(金淑滋)·김취성·김취문(金就文)·고응척(高應陟) 등이 배향되었다. 1757년(영조 33) 후손들이 정간(鄭榦)의 서문을 받아 4권 2책의 『용암선생문집』과 5책의 『용암선생별집』을 편차하였고, 1778년(정조 2) 이상정(李象靖)의 발문을 받아 4권 2책의 『용암선생문집』을 목판으로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