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90.5㎝, 가로 87㎝. 말박물관 소장. 화면의 상단에 격구에 대한 기록이 있으며 화면의 하단 좌측에는 ‘靑汀(청정)’이라는 관서(款書)가 있다. 격구(擊毬)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이여성(李如星)은 1934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1936년부터 그림의 주제를 동양화에서 역사화(歷史畵)로 바꾸었다. 그의 역사화 작업은 일제의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내선일체’를 거부하는 일이었다. 그는 “처음에는 소일 삼아 동양화를 장난한 것이 오늘은 이렇게 본격적으로 고대 풍속도를 그리게 되었다.”고 밝혔다. 그의 역사화는 상상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 의식주의 생활도구 및 각종 구성 요소를 고증하여 역사의 한 장면을 화폭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즉 이여성의 역사화는 철저한 고증에 기초한 그림이었다. 당시의 신문 기사에서 그는 “조선의 긴 역사를 시간적으로 평면화시켜 보겠다는 큰 뜻으로 조선역사와 풍속에 색다른 대목들을 붙잡아 이것을 영롱한 채관(彩管)을 통하여 체계 있는 풍속화집을 만들기로 하여 전심전력 주옥같은 명화를 한 폭 한 폭 꾸며 나갔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때부터 그는 사화가(史畵家)로 알려졌다.
그는 1936년부터 1937년까지 10여 점의 역사화를 그렸다. 그의 역사화 중에서 김유신의 고사를 보고 그린 「유신참마지도」와 김정호를 그린 「대동여지도 작자 고산자」를 비롯하여 「청해진 대사 장보고」, 「격구지도」, 철종시대 풍속화인 「가례동모이」, 고대 무사를 그린 「고무도(古武圖)」, 「악조 박연선생」, 「농악그림」, 「마상재(馬上才)」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림의 제목에서 보듯이 그는 역사화를 통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고자 하였다. 이여성은 역사화 제작을 위한 자료 수집과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의식주와 각종 생활용구 및 풍습을 찾아내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이여성(李如星)의 역사화 중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인 「격구도(擊毬圖)」는 말을 타고 격구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짜임새 있는 구도와 치밀한 사실적 묘사 그리고 단정한 색채 구사가 돋보이는 수작이다. 고려시대에 행해졌던 마상경기인 격구를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으며, 근경과 원경의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어 원근법을 이용한 사실묘사에 매우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묘사된 의복과 풍습은 고증된 것이다. 이여성은 이 작품을 그리기 위해 『어정무예통지(御定武藝通志)』,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같은 문헌자료 및 궁궐 아악부 뒤뜰 태복사(太僕司) 신당(神堂) 벽화를 동원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여성은 자신의 역사화에 대해 사라져가는 조선의 ‘옛 풍습을 그림으로 체험하여 후세에 남겨 준다는 것은 뜻있는 일’이라고 밝힌 바, 이러한 역사화를 통해 조선의 민족 정체성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문헌고증 및 화가로서의 기량이 조화를 이룬 이여성의 역사화는 미술 분야에서 조선학운동의 기운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말살 당하는 조선의 정신을 역사의 재현을 통해 되살리고자 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역사화가인 이여성의 역사화 12점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작품이다. 고전고증 및 화가로서의 기량이 조화를 이룬 작품이자 당시 말살 당한 조선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역사의식을 담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