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에 유채. 가로 10.8㎝, 세로 14.8㎝. 개인소장. 장욱진이 6·25전쟁 중 종군 화가단 생활을 그만두고 1951년 고향인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돌아가 안정을 찾던 시기의 작품이다. 전쟁 직후 자신의 상황과 심정을 그린 자화상으로, 장욱진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전쟁을 겪고 난 직후인 1951년, 그림 그릴 재료가 없던 시절이라 엽서 크기의 작은 종이에 물감 몇 개로 그렸다. 그러나 배경을 노란색의 짧은 붓 터치로 묘사해 풍요로우면서도 경쾌한 느낌을 준다. 화면을 좌우로 구획하듯 황금빛으로 물든 논 사이로 ㄱ자 모양의 붉은 길이 나있고, 그 길 위에는 정장 차림의 신사와 뒤쫓아 오는 강아지가 그려져 있다. 머리 위로 열을 지어 날아가는 새, 둥실 떠 있는 구름 등 목가풍의 배경에서 전쟁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장욱진의 작품에는 자신을 둘러싼 주변 풍경이 잘 드러나는데, 이 작품에는 전쟁통의 피난살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찾은 고향의 모습이 담겨 있다. 누렇게 벼 이삭이 익어가는 고향 마을은 전쟁으로부터 격리되어 평화롭기만 하다. 장욱진의 작품으로는 드물게 이 작품에는 집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붉은 길만이 한없이 뻗어 있다. 그 길 위에 콧수염을 기른 영국풍 신사가 유유히 걷고 있다. 그러나 길을 따라 걸어 들어왔던 화가 앞에는 나아갈 길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이때의 상황에 대해 화가는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라고 술회 한 바 있다. 즉 일본에서 서양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지식인이자 신문물의 소유자인 자신을 연미복을 입고 한 손에는 박쥐우산을, 또 다른 손에는 실크햇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해, 대자연 앞에 미미한 인간에 불과하며 고향 마을에서 이질적인 존재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이처럼 이 자화상에는 전쟁 직후 화가의 상황이 해학과 풍자로 표출되었다. 동시에 전란으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한 현실을 예술을 통해 극복하고 평정심을 되찾고자 했던 심정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을 그리던 시기의 상황은 장욱진이 쓴 「자화상(自畵像)의 변(辯)」(『畵廊』, 1979년 여름호)에 잘 타나난다. “일명 「보리밭」이라고 불리워지고 있는 이 그림은 나의 자상(自像)이다. (중략) 고향에선 노모님이 손녀를 거두시며 계시었다. 내려 오라시는 권고에 못이겨 내려가니 오랜만에 농촌 자연환경에 접할 기회가 된 셈이다. 방랑에서 안정을 찾으니 불같이 솟는 작품의욕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물감 몇 개뿐이지만 미친 듯이 그리고 또 그렸다. 이 「자상(自像)」은 그중 하나이다. 간간이 쉴 때에는 논길 밭길을 홀로 거닐고 장터에도 가보고 술집에도 들러본다. 이 그림은 대자연의 완전 고독 속에 있는 자기를 발견한 그때의 내 모습이다. 하늘엔 오색 구름이 찬양하고 좌우로는 자연 속에 나 홀로 걸어오고 있지만 공중에선 새들이 나를 따르고 길에는 강아지가 나를 따른다. 완전 고독은 외롭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