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창작단 ()

영화
단체
1983년 북한이 청소년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평양연극영화대학 안에 설립한 영화 창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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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83년 북한이 청소년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평양연극영화대학 안에 설립한 영화 창작단.
개설

북한은 영화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제작하는 만큼 협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통일적 지휘체계와 공동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여러 부문을 연출가의 지휘통제 아래 두는 창작단을 조직하였는데 그 가운데 ‘청소년 창작단’은 평양연극영화대학에서 참여하는 창작단이다.

설립목적

청소년 창작단은 청소년 교양과 흥미에 맞는 영화를 제작하고 평양연극영화대학생들의 실습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연원 및 변천

북한에서 영화창작단은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는데 청소년 창작단은 1983년 설립되었다. 평양연극영화대학이 제작 주체로 자막에 올라있는 첫 영화는 「산정의 처녀기사」(1986)이다. 이후 「우리 영심이」(1987), 「아름다운 기슭」(1990), 「도시처녀 시집와요」(1993), 「노래여 너와 함께」(1996), 「나의 가정」(2000), 「내 고향의 바다」(2005) 등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 「도시처녀 시집와요」는 북한에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주인공을 맡은 여배우 리경희는 이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었다. 영화와 제목이 같은 주제곡도 인기를 얻어 한국에까지 알려졌다.

청소년창작단의 제작 주체인 평양연극영화대학은 1953년 예술학교로 출발하였는데 1957년 국립연극학교로 되었다가 1959년 영화를 포함해 평양연극영화대학이 되었다. 그러나 학교명과 달리 연극 중심으로 교육이 이루어져 초기에는 영화가 홀대받았으나, 김정일이 영화를 강조하면서 1971년 연극학과를 폐지하고 4년제로 승격한 평양영화대학이 되었다. 1987년 다시 연극을 포함해 평양연극영화대학이 되었다.

기능과 역할

하나의 창작단은 연출가를 사령탑으로 하여 연출가는 예술과 제작 부문 모두를 통솔하도록 권한을 갖게 된다. 창작단에는 연출·배우·촬영 부문, 미술, 합성 촬영, 음악, 분장, 의상, 녹음, 편집, 장치 담당 외에 소도구 관리원 등을 포함하는 보장 부문, 행정 연출가가 소속된 행정후방 부문, 예술고문, 기술고문이 포함된 기타 부문이 하나의 팀으로 구성된다. 시나리오가 작성되어 제작이 결정되면 그에 맞추어 창작단이 결성된다.

청소년 창작단은 특히 시나리오와 연출, 배우 등에 평양연극영화대학 재학생이나 졸업생이 참가하여 학생들이 실제 촬영과 제작을 경험할 수 있으며, 이들의 고민을 담은 영화들을 제작할 수 있다.

현황

북한은 1993년 고정창작단이 자기본위에 빠져 기업화되고 서로 경쟁이 심해지자 김정일의 지시에 의해 고정창작단을 모두 해체하였는데 이 중 청소년 창작단만이 남은 상황이다.

의의와 평가

평양연극영화대학생들이 참여하는 제작단체로 청소년, 청년들의 관심을 반영한 영화를 제작하고 학생들이 실기 연습을 할 수 있다는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북한영화사』(이명자, 커뮤니케이션북스, 2007)
「영화촬영소 독립채산제」(『조선영화』5, 1991)
「영화촬영소 경영활동에서 두 자극의 합리적 결합」(『조선영화』11, 1990)
「고정영화창작단」(『조선영화』7, 1990)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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