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극회는 해방 직후 비교적 일찍 결성되었다. 혼란한 당시 상황 때문이었겠지만, 신극과 신파극, 좌익과 우익, 지식인 연극인과 상업배우 등 상반되는 성격의 연극인들이 한 극단에 모였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공연 참여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연기자 황철, 김선영, 서일성, 이해랑, 김동원, 극작가 함세덕, 연출가 이서향과 안영일, 기획자 박민천, 무대장치가 정순모 등 당대 각 분야 최고 역량의 연극인들이 함께 한 단체였다. 현실적 극단 운영을 고려하여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신파극을 공연하면서도 주기적으로 작품성 높은 정극 공연을 시도하는 등 극단의 분명한 방향성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념적으로는 ‘정치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입장에서 연극하기’라는 설립 취지를 지키지 못 하고 결국 좌익 연극으로 치우침으로써 한국 연극사의 주류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45년 9월 황철의 주도하에 함세덕, 서일성, 박민천, 이해랑, 김선영, 김복자 등과 함께 조직한 단체이다. 창단 공연은 1945년 11월 1일 독일의 극작가 쉴러의 작품 「군도」를 함세덕이 번안하고 연출한 「산적」이었다. 1946년 1월 4일 극단 전선과 합동공연으로 김사량 작 「붓돌이의 군복」을 올렸고, 그 외 김사량 작 「호접」, 임선규 작 「바람부는 시절」, 함세덕 작 「기미년 3월 1일」, 조우 작 「뇌우」 등 비교적 왕성한 공연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1947년 조선연극동맹이 주최한 3·1절 기념 공연에 예술극장, 자유극장, 혁명극장, 낙랑극회, 민중극장, 문화극장, 무대예술연구회 등 7개 극단이 합동으로 함세덕 작, 이서향 연출의 「태백산맥」을 공연한 후 해산되었다.
낙랑극회는 신극과 신파극, 우익과 좌익, 지식인 연극인과 상업배우들이 공존하며 다양한 연극과 기풍을 보여준 특이한 사례로서 해방 후 우리 연극을 조망하는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