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불상 높이 76㎝, 무릎 너비 43㎝. 석조약사여래좌상은 방내리사지(坊內里寺址)에서 출토되어 1937년에 현재의 송라사로 옮겨진 것이다. 불상과 광배가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약사여래좌상으로 추정된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이 발견된 방내리사지(坊內里寺址)는 창건 및 폐사시기를 알 수 있는 문헌이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에는 방내리 불상과 탑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이후 자료에서는 ‘방현사지(坊縣寺址)’로 불리고 있다. 또한 「청송사사적기(靑松寺事蹟記)」에는 신라 효소왕 때 처묵화상이 창건한 방현사라는 사찰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확실하지 않다.
현재의 방내리사지는 교동 탑골마을 내에 위치한 방내리 삼층석탑 일대로, 석조약사여래좌상 역시 이곳에서 발견되어 1937년에 현재의 송라사를 창건하고 옮겨와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다.
불상과 광배는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는데, 전체적으로 호분(胡粉)을 발랐던 흔적이 남아있다. 마찬가지로 광배의 외곽과 뒷면에도 붉은색을 칠했던 흔적이 확인된다. 광배는 위가 뾰족한 형태인데, 안쪽으로 두광(頭光)과 신광(身光)을 두 줄 선으로 새기고 그 주변을 화염문(火焰文)으로 장식했다.
머리 부분에는 둥근 형태의 나발(螺髮)과 함께 낮은 육계가 표현되었지만 마모가 심해 분명하지 않다. 눈, 코, 입 부분 등은 마모가 심해 세부 표현을 확인할 수 없고, 얼굴 크기에 비해 큰 백호는 근래에 구슬을 삽입한 것이다. 목은 짧고 삼도는 표현되지 않았다.
착의법은 왼쪽 어깨를 반달형으로 덮은 변형편단우견으로, 통일신라 시대 크게 유행했던 편단우견 항마촉지인의 좌상이 변화한 형태로 이해된다. 옷주름이 전체적으로 두껍고 단조로운 형태이다. 일반적으로 대의(大衣)를 걸쳤을 때 나타나는 주름과는 무관하게 다소 투박한 형태로 도식화 되었고, 왼쪽 팔에 걸치거나 무릎 아래로 흘러내린 표현 역시 부자연스럽다. 옷주름이 대좌 아래까지 덮고 있어 무릎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른손은 무릎까지 내려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고, 왼손은 가슴 높이까지 들어 올려 둥근 형태의 약함(藥函)을 받치고 있는데, 이처럼 약함을 든 왼손을 높이 들어올린 자세는 강원도 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며, 원주 봉산동, 학성동 출토 약사여래좌상 등도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의 바깥으로 드러난 두 팔은 몸에 비해 왜소하고 상대적으로 약함은 크게 조각되었다.
석조약사여래좌상은 하체 부분이 상대적으로 둔중한 느낌으로, 몸에 비해 두 팔은 왜소하고 약함은 크게 조각되는 등 전반적으로 비례에서 부자연스럽다. 방내리사지에 남아있는 삼층석탑과 동일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석탑의 기단부에 조각된 불상과도 유사한 모습이다.
불상과 광배를 하나의 돌에 조각한 드문 형태의 좌상으로 약함을 지물로 갖고 있어 약사여래를 조각했음을 알 수 있다. 둥근 형태의 상호와 투박하고 도식화된 옷주름 표현 등은 고려시대 불상 양식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