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생몰년 및 생애는 알 수 없으나 19세기 후반~20세기 전반에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에 거주하면서 서울·경기 지역 사찰의 많은 불화를 제작하였다.
1881년에 수화승 동호 진철(東昊 震徹)과 함께 강화 전등사 현왕도 제작을 시작으로 1883년에 수화승 경선 응석(慶般 應釋)과 서울 흥국사 신중도를, 다음 해인 1884년에는 금화 기형(錦華 機烔), 대허 체훈(大虛 體訓)과 함께 예천 용문사 명부전 시왕도를 제작하였다. 용문사 시왕도 제작에 상궁 천씨보전화(千氏寶殿華)가 시주자로 참여한 것으로 보아 왕실 불사와 인연이 있던 화승들이 경상북도에 와서 작업한 것으로 보인다.용문사 시왕도에서 심판장면과 지옥장면을 성곽을 경계로 나누는 방법은 19세기 후반 서울∙경기도에서 성행한 구도법이다. 용문사 불사 이후 다시 서울·경기 지역으로 돌아와 서울 지역에서 가장 많은 불화를 제작하였다.
긍법이 수화승으로 처음 작업한 작품은 1894년에 제작한 상원사 중대 석가모니불도이다. 이때 상원사 중대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1895년) 개금에도 참여하였다. 사자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 복장중수발원문에 의하면, 수화승으로 혜산 축연(蕙山 竺衍), 범화 윤익(梵化 潤益)과 함께 참여하였다.
긍법은 말년에 봉원사 괘불, 흥국사 괘불 등 큰 규모의 왕실발원 불사에 참여하여 근대 초 서울 지역의 대표 화승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수국사 극락구품도(1907년)는 화면을 9등분하여 그리는 서울 지역 구품도의 분할구도법을 사용하였다. 그의 작품은 주로 서울·경기 지역 사찰에서 일괄로 불사를 할 때 동참하여 한 사찰에 여러 점의 불화를 남기고 있다. 화풍은 19세기 말~20세기 초의 음영법, 군청색의 사용과 같은 지역 특징을 충실히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