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서울 지역 불화를 토대로 20세기 초까지 전라도 순천 선암사 일대에서 활동한 화승이다. 즉 초기에는 서울 지역에서 수화승 경선 응석(慶船 應釋), 금곡 영환(金谷 永煥)과 불화 제작을 하였다. 이후 금암 천여(錦庵 天如), 운파 취선 등 전라도 수화승과 함께 작업하면서 활동 무대를 전라도로 옮긴 듯 하다.
두삼(斗三)은 초기에는 남양주 흥국사를 기반으로 활동한 경선 응석을 중심으로 긍법(亘法), 돈법(頓法), 창오(昌旿) 등과 많은 작품을 하였다. 1879년 송광사 지장시왕도에서 화주(化主)로 참여하였다. 1907년 해남 대웅전 중건기 현판에 의하면 본사 시주질에, 1902년 선암사 심검당 아미타회상도에는 지전비구(持殿比丘: 불전이나 법당에서 예불을 맡은 승려)로 참여하고 있다.
1901년 서울 연화사의 대규모 불사에 참여하여 수화승 한곡 돈법(漢谷 頓法)과 함께 아미타괘불도, 지장시왕도, 신중도 등을 조성하였다. 신중도에 사용된 금박과 청색 사용, 바림법은 19세기 후반 서울·경기 지역 불화에서 많이 나타나는 채색법이다. 이 대규모 불화 제작에 한봉 응작(漢峰 應作), 대은 돈희(大恩 頓喜), 계은 봉법(啓恩 奉法), 보산 복주(寶山 福珠), 보암 긍법(普庵 亘法), 금운 정기(錦雲 正基), 한곡 돈법 등 당시 서울·경기 일대의 불화를 도맡았던 화승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어 이들과 무리를 이루며 서울 지역 화풍을 습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871년 함양 벽송사 신중도 제작에 전라도 선암사 화승인 금암 천여를 수화승으로 모시고 작업한 이후 활동 지역을 남도 지역으로 옮겨 순천, 통영, 강진 등에서 불화를 제작하였다. 이 시기 그의 화풍은 초기 서울·경기 지역의 화풍에서 금암 천여의 화풍으로 바꾸어 불화를 제작하였다. 선암사 천불도(1907년) 제작에서 두삼은 화주(化主)와 본방질(本房秩)편에 기록되어 선암사 거주가 확인된다. 천불도의 도상은 거의 정사각형 화면에 네 귀퉁이에 사천왕을 배치하고 화면 가운데 이중원형으로 구획을 정해서 본존을 중심으로 6위의 부처가 배치되고 외부에는 10개의 원 안에 작은 부처를 배치하는 독특한 구도를 보인다. 그리고 전라도 지역의 전통 양식인 적색과 녹색의 화려한 색채가 두드러진 불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