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칙유원량(御製飭諭元良)』은 필사본으로, 첩장(帖裝)이다. 작성 시기는 1746년(영조 22) 후반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 중 세자의 나이를 10살 정도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단 1744년(영조 20)을 전후로 작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본문에서 1745년(영조 21)에 간행된『어제상훈(御製常訓)』과 1746년(영조 22)에 간행된 『어제자성편(御製自省篇)』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746년 후반 이후로 추정해볼 수 있다.
『어제칙유원량』은 영조(英祖)가 세자에게 훈계하기 위해 작성한 어제(御製)로, 사도세자에게 경계해야할 바를 말하고 학문을 권장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영조는 자신이 30세 이후 밤낮으로 경계하고 두렵게 생각한 것은 ‘간(艱)’자 한 글자라 하면서 항상 정섭(靜攝) 중에는 이 마음으로 임했다고 하였다. 세자 역시 이를 경계하고 아울러 학업을 권면하도록 훈계하기 위해 어제를 작성하였다고 밝혔다.
어제에서 영조는 ‘간’자를 강조하면서 요순(堯舜)은 이 의미를 잘 알았던 것이고, 걸주(傑紂)는 이를 몰랐다고 하면서 이를 보여주는 예로 걸주의 녹대(鹿臺)와 주지(酒池), 그리고 요순의 영대(靈臺)와 영소(靈沼)를 대비시켜 설명하였다. 녹대와 주지는 사치와 방탕함을, 영대와 영소는 여민동락(與民同樂)을 상징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 궁궐에 있는 당(堂)이나 정(亭)의 명칭이 우연이 아님을 강조하였다. 즉 어수당(魚水堂)은 풍운의 기회가 부합한다는 의미이고, 낙민정(樂民亭)은 백성과 함께 즐거워한다는 뜻이며, 관풍정(觀豊亭)은 백성의 풍년을 기원한다는 의미 등이 있다고 하며 그 의미를 되새기라고 하였다. 세자의 나이가 이제 10살이 지났는데 편안하게 생활하면서 간난(艱難)의 어려움이 조금도 없으며, 단지 하는 일이 문안을 드리는 것 이외에는 강학(講學) 뿐이니, 강학을 더욱 힘쓰라고 권하였다. 어제에서는 특히 국왕의 자신의 경계하는 바와 함께 세자에게도 경계하도록 ‘간’자를 1백 회 반복해서 썼고, 마지막에는 ‘간’자를 차운한 시를 적었다.
조선 후기 영조가 세자의 훈육을 위해 작성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자신이 지향하는 군주상을 제시하고 있다. 영조가 구상한 제왕학(帝王學)의 한 단면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