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위(李煒, 1716~1797)의 자는 사휘(士暉), 호는 비목재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이위는 노론 학맥인 윤봉구(尹鳳九)의 문인으로, 1750년(영조 26) 문과 급제 후 가주서와 성균관 전적 등을 거쳐 전라도 도사를 역임하였다. 이 책은 문과 급제 이후 관직 생활을 하던 기간인 1750년 2월 30일부터 1754년(영조 30) 4월 30일까지의 일기와 1779년(정조 3) 6월 24일부터 1781년(정조 5) 윤5월 1일까지의 일기를 담고 있다.
1책(61장)으로 된 필사본이다. 전편과 후편으로 구성되었는데, 전편은 저자가 직접 쓴 부분으로 글자의 크기가 작고 조밀하며 일정하다. 이에 비해 후편은 글씨체가 전편과 차이가 있고 대자(大字)와 소자(小字)로 본문과 설명을 하고 있어, 후대에 훼손된 부분을 다른 인물이 필사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책은 그 동안 소개되지 않다가 2000년도에 번역서가 출간되면서 알려졌다.
전편은 1750년(영조 26) 2월 30일부터 1754년(영조 30) 4월 30일까지를 기록하였고, 동관록(同官錄)과 전문(箋文), 시(詩)가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내용은 1750년 2월 30일 『주역』·『서경』·『시경』·『논어』·『맹자』·『중용』을 텍스트로 한 강경(講經)에 응시하여 16분(分)의 점수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같은 해 3월 26일 식년시에서 병과에 급제하였는데, 동방(同榜)으로 한명여(韓命輿)·김시묵(金時默) 등이 있었다.
급제 이후 일기는 그가 주서(注書)에 의망(擬望)되었으나, 말망(末望)으로 관직 진출이 좌절되면서 곤궁한 삶을 사는 광경을 기록하였다. 2년 뒤인 1752년(영조 28) 사변가주서에 제수되어 국왕 측근에서 벌어지는 일을 기록하였는데, 특히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신료들을 접견하는 내용을 풍부하게 기록하였다. 저자는 이후 성균관 전적과 형조좌랑, 종묘서령 등을 지냈는데, 이 기간 동안 현직에 있으면서 겪었던 일상사를 수록하거나 국왕의 거둥 소식, 국가의 주요 인사, 과거 설행의 실태 등을 기록하였다.
후편은 1779년(정조 3) 6월 24일부터 1781년(정조 5) 윤5월 1일까지를 기록하였고, 부(賦)와 명(銘), 교지(敎旨)를 부록으로 수록하였다. 내용은 저자가 63세가 되는 1779년 6월 24일 일기(日氣)를 시작으로, 6월 27일 정치원(鄭致遠)이 담배를 보내온 사실을 적고 있다. 6월 28일 광흥창 주부에 제수된 후 관복을 비롯한 도구나 노복 등을 지인에게 빌리는 내용을 적었고, 이어 광흥창에 입고되는 물자나 녹봉으로 나간 액수 등을 꼼꼼히 적고 있다.
동시에 중앙 정치의 동향에도 관심을 두어 관직의 이동이나 국왕의 능행, 고위 관직자를 방문한 사실 등을 기록하였다. 1779년(정조 3) 12월 25일 온릉령(溫陵令)에 제수되어서는 능을 보호하고 제사를 지낸 사실 등을 기록하였고, 1780년 8월 전라도 도사에 제수된 뒤 조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의 참배와 관하 수령에 대한 포폄 등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 책은 개인의 생활사를 복원할 수 있는 자료일 뿐만 아니라 『영조실록(英祖實錄)』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보완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전편에서는 영조대 중반 정치사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어 객관성이나 현장성, 신빙성 등이 뛰어나다. 다만 내용의 상당 부분이 『승정원일기』와 유사하다는 한계는 있다. 이 밖에도 당시 인물에 대한 평을 수록하고 있어 참고가 되며, 광흥창과 같이 재직하던 관서의 운영상을 기록하고 있어 그 실태를 파악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