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삼무역 ()

조선시대사
개념
18세기 말부터 수삼을 가공하여 생산한 홍삼을 해외 시장에 수출해온 경제활동.
이칭
이칭
인삼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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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홍삼무역은 18세기 말부터 수삼을 가공하여 생산한 홍삼을 해외 시장에 수출해온 경제활동이다. 18세기 전반까지의 인삼은 자연산으로 지금의 산삼이었다. 18세기 중후반부터 산삼이 거의 사라지자 인삼 재배가 성행하였다. 19세기 들어 개성상인들이 인삼 재배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면서 홍삼무역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홍삼 원료인 6년근 인삼은 1810년대부터 6·25전쟁 발발 이전까지 개성인이 재배하였다. 18세기 말에 시작된 홍삼무역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의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2백년 넘게 성행하고 있다.

정의
18세기 말부터 수삼을 가공하여 생산한 홍삼을 해외 시장에 수출해온 경제활동.
홍삼의 탄생

고대부터 인삼은 우리 역사 속 핵심 무역품이었다. 18세기 전반까지 인삼은 자연산 인삼, 즉 지금의 산삼이었다. 18세기 중후반이 되면 산삼은 거의 절종되었다. 그러자 인삼 재배가 성행하기 시작하였고, 삼포(蔘圃)에서 재배한 인삼인 '가삼(家蔘)'을 쪄서 말린 홍삼이 등장하였다. 재배한 인삼을 장기간 보존하고 약재로 활용하기 위해 쪄서 말린 붉은 빛의 홍삼으로 가공한 것이다.

18세기 말엽 조선 상인들은 대청 무역 침체를 타개하기 위해 홍삼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세기 들어 개성상인(開城商人)들이 인삼 재배에 대대적으로 투자하면서 홍삼무역은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홍삼 원료인 6년근 인삼 재배는 1810년대부터 6 · 25전쟁 발발 이전까지 개성인이 맡아하였다.

홍삼무역을 수행한 주체는 시기에 따라 달랐다. 19세기에는 대개 ' 만상(灣商)'으로 일컬어졌던 의주상인(義州商人)이 맡았으며, 대한제국 이후 일제강점기에는 거의 일본의 미쓰이물산이 맡았다.

인삼무역의 호황과 쇠퇴

우리 역사 속 역대 왕조는 인삼을 외교적 · 경제적으로 활용해 왔다. 그런데 가장 활발한 인삼 교역은 17세기 전반에서 18세기 전반에 걸친 시기에 있었다. 이 이전에는 인삼 대부분이 중국으로 수출되고 일본으로는 외교용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만주에서 흥기한 청나라에서는 인삼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어서 조선 인삼에 대한 수요가 크게 감소하였다. 청나라로 인삼을 수출하던 조선 상인들은 위기를 맞았다. 그들은 일본 시장 개척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이때 비로소 일본으로 인삼 수출이 시작되었다. 마침 일본은 고가의 인삼을 결제할 수 있는 은이 풍부하게 산출되었다.

인삼을 매개로 조선-청-일본 간 삼국 무역이 전개되었다. 조선 상인은 인삼을 일본에 수출하고 그 대가로 은을 받았다. 이 은을 갖고 청나라에 가서 비단 등을 구입하였다. 그들은 비단 등을 조선은 물론 일본으로도 수출하였다. 이러한 무역 구조하에서 삼국 간 무역은 커다란 호황을 누렸다.

조선과 일본의 핵심 수출품인 인삼과 은은 자연에서 채취한 것이다. 무역 호황기에 두 나라에서 인삼과 은이 마구 채취되었다. 그 결과 18세기 전반기를 지나면서 인삼과 은은 고갈되기 시작하였다. 조선과 일본은 인삼과 은을 대체할 수 있는 수출품이 없었고 삼국 간 무역은 쇠퇴하였다.

홍삼무역의 시작

18세기 말엽 조선 상인들은 대청 무역 침체를 타개하기 위한 새로운 무역품을 개발하였다. 그것은 인삼이었다. 다만, 이때의 인삼은 자연산이 아니라 인삼을 쪄서 말린 홍삼인 '가삼'이었다.

조선 사람들은 늦어도 17세기 중반에는 인삼 재배법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알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인삼 재배가 성행한 때는 1770년대 이후이다. 이 무렵부터 영남에서 진상(進上) 인삼에 가삼을 포함시키면서 문제가 되었다. 가삼은 자연산 인삼보다 효능이 떨어졌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고 여러 차례 대책을 논의하였다. 논의 과정에서 정조와 대신들은 가삼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당시 가삼은 상인에 의해 청나라로 수출되고 있었다.

가삼의 가치를 알게 된 조정에서는 수원화성을 완공한 후 수원 부흥책으로 이 가삼을 활용하고자 하였다. 수원이 번성하기 위해서는 유력 상인을 유치할 필요가 있었다. 수원으로 이주해 올 상인들에게 가삼 무역권을 부여하는 방안이었지만 이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정조는 대청 수출 쇠퇴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역관(譯官)들에게 가삼 무역권을 주어서 회생시키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조정 정부의 이 제안은 1797년(정조 21)에 「삼포절목(蔘包節目)」 제정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때부터 홍삼무역은 정부 공인하에 본격화되었다. 절목에 의해 가삼 무역권은 역관에게 주어졌고, 역관은 홍삼무역의 이익을 사행 경비 및 사역원 경비 등으로 사용하였다. 홍삼무역은 초창기부터 재정 보충책으로 활용되었다.

홍삼무역의 변동

홍삼무역은 이후 큰 변동을 겪었다. 변동을 추동(推動)한 것은 잠삼(潛蔘)의 존재였다. 잠삼이란 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고 불법적으로 청나라로 수출되던 홍삼을 말한다.

1820년대 이후 잠삼 수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였다. 잠삼의 급증 배경에는 개성상인의 인삼업 투자가 있다. 1810년대까지 인삼 재배는 영남과 강원 등지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홍삼 수출량도 120근에서 200근 정도였다.

1810년대를 지나면서 개성상인들이 인삼업에 본격적으로 투자하였다. 개성상인은 상업 활동을 통해 풍부한 자본을 축적하고 있었다. 또한, 개성상인은 시변(時變)이라는 금융 제도를 통해서 삼포 경영에 필요한 자금을 제때에 조달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충분한 자본과 금융 시스템을 갖춘 집단은 개성상인이 유일하였다. 인삼 재배가 개성 지역에서 성행한 이유이다. 1820년대 이후 개성 지역은 인삼 주산지로 등장하였고, 이때부터 홍삼 원료인 6년근 수삼은 대부분 개성 지역에서 공급되었다.

개성상인의 삼업(蔘業) 투자는 공식 홍삼 수출량을 훨씬 뛰어넘었다. 의주상인과 개성상인은 잠삼을 만들어 수출하였다. 이는 역관 주도 홍삼무역에 타격을 주었다. 정부는 대책을 마련하였다. 그 대책의 요지는 잠삼 수량을 공식 수출량에 포함시켜서 잠삼을 없애는 것이었다. 공식 수출량 증가는 홍삼무역의 수입 증가를 의미하므로 정부 입장에서도 나쁠 것이 없었다.

이런 정책하에서 1820년대 이후 공식 홍삼 수출량은 급증하였다. 1797년에 120근이던 것이 1823년(순조 23)에는 1천 근, 1827년(순조 27)에는 3천 근, 1832년(순조 32)에는 8천 근으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정부의 기대와 달리 개성상인의 인삼업 투자는 계속 증가하였고 잠삼은 근절되지 않았다. 개성상인의 삼포 투자는 1840년대 들어서 절정을 맞았다. 잠삼을 공식 수출량에 포괄시키는 정책을 시행한 결과, 1847년(헌종 13)과 1851년(철종 2)의 공식 수출량은 4만 근에 이르렀다. 1832년의 8천 근과 비교하면 15년 사이에 다섯 배나 증가하였다. 이후 홍삼 수출량은 대개 2만 5천 근 수준을 유지하였다. 이처럼 홍삼무역은 큰 변화를 겪었는데, 그 변화를 추동한 것은 개성상인의 삼업 투자였다.

6년근 수삼을 홍삼으로 제조하는 실무도 개성인이 수행하였으며, 홍삼을 제조하는 증포소(蒸包所)를 개성에 두었다. 이 시기 홍삼무역권은 역관에게 있었다. 역관은 홍삼무역권을 통해 큰 수입을 얻었다. 그 수입을 사행 및 사역원 경비로 사용하였다.

한편 청나라 사람들과 실제로 홍삼을 거래한 주체는 의주상인이었다. 이처럼 원료인 수삼 생산과 홍삼 제조는 개성인이, 홍삼무역권은 역관이, 실제 교역은 의주상인이 담당하는 체제가 갑오개혁으로 사역원(司譯院)이 폐지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홍삼 수출량 급증으로 역관 및 사역원에서 필요로 하는 경비 이상의 수입이 발생하였다. 이에 호조도 그 수입의 일부를 차지하고, 의주부와 개성부도 그 수입의 일부를 배정받았다. 또한, 대원군은 군비 강화 과정에서 부족한 경비를 홍삼무역 이익으로 충당하였다. 고종은 1884년(고종 21)부터 홍삼무역의 이익 중 일부를 차지하여 왕실 재정을 확충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및 일제강점기 홍삼무역

대한제국 시기 황실은 홍삼무역권을 장악하고 홍삼 이익을 독차지하였다. 이를 위해서 전매제에 준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때도 개성인이 수삼을 생산하고 홍삼 제조 실무를 맡았다. 황실은 홍삼 원료 수삼을 개성 삼포민들로부터 수집하였다. 그 대가로 수삼 배상금을 지급하였다.

배상금 책정을 둘러싸고 황실과 삼포민이 대립하였는데, 대개 황실의 의지가 관철되었다. 그렇지만 황실은 가을에 지급할 수삼 배상금을 봄에 미리 지급하여 삼포민의 자금 조달에 도움을 주었다.

황실은 잠삼을 철저히 단속하기 위해서 수삼 채굴 및 홍삼 제조 시기에 개성 일대에 순검(巡檢)은 물론 군대까지 파견하였다. 그 결과 잠삼은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홍삼을 확보한 황실은 직접 중국으로 수출할 수 없었으므로 민간 업체에 홍삼 수출을 위탁하였다. 1900년에 위탁 업체로 미쓰이물산이 선정되었다. 이때부터 8 · 15광복 직전까지 홍삼 수출은 거의 미쓰이물산이 맡았다.

일제는 1908년에 홍삼 전매제를 실시하였다. 대한제국 황실과 달리 경작 허가제를 시행한 것이다. 이전에는 삼포를 개설하는 데 제한이 없었다. 그런데 일제는 경작 허가제를 통해 삼포민의 협조를 얻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도 수삼 생산은 거의 개성인이 하였다.

일제는 패망할 때까지 홍삼 수출 수량을 3만 근 내외로 제한하였다. 명목은 중국 시장에서 홍삼의 성가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홍삼 제조는 개성에 있는 조선총독부 전매국(專賣局) 개성출장소 안에 위치한 증포소에서 이루어졌다. 홍삼 수출은 미쓰이물산이 계속하였다.

조선총독부 전매국은 개성 삼포민이 생산한 수삼을 적당한 가격으로 수매하고, 그것으로 홍삼을 제조해서 수삼 구입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으로 불하하여 손쉽게 막대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미쓰이물산 역시 홍삼을 불하받아서 불하 가격의 몇 배 높은 가격으로 판매함으로써 큰 수익을 얻었다.

의의

조선 사람들은 자연산 인삼, 곧 산삼의 고갈로 대청 수출이 위기에 처하자 대체품으로 홍삼을 개발하여 수출하였다. 홍삼은 자연산 인삼과 달리 사람이 생산하는 근대적 성격의 상품이다. 현재까지도 홍삼은 우리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이다. 조선은 1797년에 근대적 상품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19세기 전반기에 영국은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여 중국인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반면 조선은 아편 중독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홍삼을 수출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단행본

이철성, 『조선후기 대청 무역사 연구』(국학자료원, 2000)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인삼사(人蔘史)』 권3(조선총독부 전매국, 1938)
『조선전매사(朝鮮專賣史)』 권3(조선총독부 전매국, 1936)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인삼사(人蔘史)』 권2(조선총독부 전매국, 1935)

논문

양정필, 「17~18세기 전반 인삼무역의 변동과 개성상인의 활동」(『탐라문화』 55, 2017)
양정필, 「1910년대 일제의 삼업정책과 개성 삼포주의 활동」(『역사문제연구』 14, 2010)
양정필, 「대한제국기 개성지역 삼업 변동과 삼포민의 대응」(『의사학』 18, 2009)
양정필, 「19세기 개성상인의 자본전환과 삼업자본의 성장」(『학림』 23, 2001)
관련 미디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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