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적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석당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이칭
중집(仲集), 석당(石塘)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90년(숙종 16)
사망 연도
1762년(영조 38)
본관
금성(錦城)
출생지
화순
관련 사건
철제 혼천의 제작
정의
조선 후기에, 『석당유고』 등을 저술한 학자.
생애

나경적(羅景績, 1690~1762)의 본관은 금성(錦城), 자는 중집(仲集), 호는 석당(石塘)이다. 1690년(숙종 16)에 화순 이서면 야사리에서 나재우(羅載祐)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후에 나재홍(羅載弘)에게 입양되었다. 화순 실학의 선구자로, 1760년(영조 36) 나주에서 홍대용, 제자 안처인(安處仁)과 나주에서 철제 혼천의를 만들었다.

활동사항

그는 호남지역 실학의 선구자로, 평생 고향에 머물면서 활동하였으나 사승관계, 사상, 활동 등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동복지(同福誌)』에서는 ‘효우가 지극하고 학식이 고명했으며 숨어 지내면서 의리를 행하고 명성을 구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금성나씨대동보』에 의하면, 김창흡(金昌翕)·조정만(趙正萬)과 시를 주고 받았고, 세상 사람들이 ‘석당처사(石塘處士)’라고 불렀다.

나경적은 선기옥형(璇璣玉衡, 혼천의)·자명종(自鳴鐘)·자용침(自舂砧)·자전마(自轉磨)·자전수차(自轉水車) 등을 발명하였다. 제작 방법은 전해지지 않으나, 중국 제도의 결함을 보충하고 서양 방법을 참고하여 모방이 아닌 창조적 발상을 통해 제작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혼천의 제작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과의 만남을 통해 실현되었다. 1759년(영조 35) 가을, 홍대용이 나주목사로 부임한 부친 홍륵(洪櫟)을 뵙기 위해 나주에 갔다가 그를 방문하여 천문학과 혼천의 등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홍대용은 29세, 그는 70세의 고령이었다. 이듬해 초여름, 그는 홍대용의 초청을 받아 나주로 가서 나주목사의 후원 하에 철제(鐵製) 혼천의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제작 과정이 끝나기 전에 세상을 떠나 제자 안처인이 홍대용과 함께 미비한 부분을 수정하여 완성한 후 농수각(籠水閣)에 설치하였다.

또한 그는 생전에 하영청(河永淸, 1697〜1771)과 실학을 논하는 교유 관계를 형성하였다. 하영청은 하백원(河百源, 1781〜1844)의 증조부로, 고을의 습속을 교화하고 향촌 자제 교육을 위하여 향약과 학교 설치에 앞장설 때에 폐허로 있던 집터를 팔아 부지를 제공한 인물이다. 이때 나경적은 하영청의 병암정사(屛巖精舍)에 자주 들러 시문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선기옥형을 제작할 때에도 함께 상의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실학 사상은 하백원에게 이어졌고, 안처인·염영서(廉永瑞) 등의 제자를 두었다.

상훈과 추모

그의 학문적 명성은 홍대용을 통하여 중국에까지 알려져, 소주(蘇州) 지역의 반정균(潘庭筠)은 그를 ‘정주(程朱)의 무리’라고 일컬었고, 엄성(嚴誠)은 그의 재주를 썩게 두어서는 안된다고 평할 정도였다.

그의 무덤은 전라남도 화순군 이서면 당산(堂山)에 위치한다. 문집으로 『석당유고(石塘遺稿)』의 초고가 집안에 보관되어 왔으나, 중간에 분실되었다.

참고문헌

『동복지(同福誌)』
『담헌집(湛軒集)』
『금성나씨대동보』(회상사, 1987)
「간찰에 나타난 학술적 교유의 양상들」(안동교, 『고문서 연구』38,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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