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회연교 ()

조선시대사
사건
1800년(정조 24) 5월 그믐날에 정조가 연석(筵席)에서 내린 하교.
내용 요약

오회연교는 1800년(정조 24) 5월 그믐날에 정조가 경연 석상에서 내린 명령이다. 정조는 군주에게 맞서는 일부 신료들을 향하여 경고하며 군주가 천명하는 정당한 의리에 적극 호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 명령을 내리게 된 계기는 이만수의 형인 이시수가 당시 우의정으로 재직 중인 상황에서 이만수를 이조판서에 임명한 것을 김이재가 비판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이 사안을 정당한 군신의리 확립의 정치적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다. 정조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정조 사후 오회연교는 시파와 벽파에 의해 정쟁에 이용되었다.

정의
1800년(정조 24) 5월 그믐날에 정조가 연석(筵席)에서 내린 하교.
개설

오회연교(五晦筵敎)는 정조가 1800년(정조 24) 5월 그믐날에 경연 석상에서 내린 명령이다. 이때 정조는 신하들에게 영조대 이후 주요 시기마다 있었던 정치 의리의 의미 및 변화상을 설명한 후, 당파의 사적(私的) 의리를 관철시키기 위해 군주에게 맞서는 일부 신료들을 향하여 경고하며 군주가 천명하는 정당한 의리에 적극 호응하라고 촉구하였다.

역사적 배경

정조는 신임의리와 임오의리 그리고『명의록(明義錄)』 의리를 통합하는 새로운 군신의리를 정립하려고 하였는데, 이를 위하여 신하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촉구하는 오회연교를 내렸다.

정조가 오회연교를 내리게 된 계기는 노론 시파(時派) 김이재(金履載)가 이만수(李晩秀)의 이조판서 진출을 비판한 데서 비롯하였다. 이만수의 형 이시수(李時秀)가 당시 우의정으로 재직 중인 상황에서 정조는 상피(相避)의 관행을 뛰어넘어 이만수를 이조판서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노론 시파 김이재는 정조의 이러한 인사를 비판하였고, 이만수의 행위에 대해서도 군주의 뜻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이에 정조는 속습(俗習)을 바로잡는 교속(矯俗)의 차원에서 다스리겠다는 의미로 김이재를 처벌하였고, 그를 사주한 자도 자수하라고 경고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정에서는 군신의리에 대한 격렬한 논전이 일어났다. 사실 정조는 김이재의 배후에 김이익(金履翼)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때 교속의 의미를 부연하여 강조한 것이 오회연교의 주된 내용이다. 정조의 반응은 일면 과도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는 이 사안을 정당한 군신의리 확립의 정치적 계기로 활용하고자 했던 듯하다.

경과

오회연교에서 문제가 된 인사는 노론 시파 김이재와 김이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군주의 정당한 인사 행위를 속습에 의거하여 비판함으로써 불신 풍조를 조장하는 세력을 향한 경고였다. 따라서 오회연교가 이들 두 사람 혹은 이들로 대표되는 노론 시파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으며, 사안 역시 단지 이시수·이만수 형제에 대한 인사 문제를 둘러싼 논란에 그치지는 않는다. 즉 정조는 외척 혹은 궁중 세력과 연계하여 군주에 맞서서 별도의 의리를 관철시키려는 속습을 바로잡으려 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정조는 그동안 일정한 정치 의리를 기준으로 8년 단위로 신하들을 등용하였고, 앞으로도 신하들은 군주의 정당한 의리 천명에 대해서는 맞서려 하지 말고 적극 호응할 것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오회연교는 김이재의 이만수 비판에서 발단하였지만, 정조의 목표는 신하들에게 만연한 오랜 속습의 교정에 있었다.

정조가 말하는 속(俗)이란 막연히 속습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국왕의 정당한 의리를 의심하고 혼란시키는 당파적 습속을 말한다. 지난날 경종대의 신임옥사(辛壬獄事), 영조대의 임오화변(壬午禍變), 세손 대리청정 저지의 시도는 외형은 다르지만 모두 이러한 속습이 빚어낸 결과이기 때문이다. 정조는 필생의 과업으로 신임의리(辛壬義理)와 ‘영조의 임오의리(壬午義理)’, 그리고『명의록(明義錄)』 의리를 통합한 새로운 군신의리 곧 ‘정조의 임오의리’를 핵심으로 한 ‘대의리(大義理)’를 천명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군신의 신뢰와 화합이 무엇보다 중요하였는데, 이에 정조는 신하들이 과거의 속습에 얽매여 당파별로 별도의 의리를 내세우며 다른 당파를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정조가 말하는 별도의 의리란 이제는 과거의 의리[고의리(古義理)]에 불과한 신임의리, ‘영조의 임오의리’, 『명의록』 의리 가운데 하나를 당파에 따라 절대적 준거로 삼는 것을 가리킨다. 이들 세 가지 의리는 정조가 평생 확립하려 하였던 ‘대의리’ 곧 지금의 의리[금의리(今義理)]의 일부일 뿐이므로, 정조는 일부 신하들이 과거의 의리를 고집하는 것은 앞으로 천명될 새로운 통합의리에 대항하는 반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 것이다. 정조는 이상의 연교(筵敎) 내용을 널리 반포하여 신하들에게 호응할 것인지 반성할 것인지 분명한 견해 표명을 요구하였다.

결과

오회연교에 대하여 노론 벽파인 이서구만 고금(古今)의 의리가 다르지 않다는 정조의 견해에 호응하는 상소를 올렸을 뿐, 대부분의 신하들은 침묵하며 연교를 외면하였다. 정조는 이러한 풍조에 분개하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더 이상 논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순조대 초반 정순왕후가 집권하자 벽파는 오회연교의 내용을 김이재·김이익 처벌로 한정시켜 시파를 제거하는 데 활용하였다. 그 후 시파가 집권하자 김이재·김이익은 중용되었으나, 정조가 오회연교에서 의도한 군신의리의 재정립은 실현되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오회연교는 정조가 평생토록 정립하려 했던 대의리로 향해 가는 결정적 단계였으나, 정조의 건강 악화와 신하들의 침묵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다. 정조 사후 오회연교는 시파와 벽파에 의해 그 의미가 축소된 채 정쟁에 이용되는 데 그쳤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정조대 탕평정국의 군신의리 연구』(최성환,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조선후기 탕평정치 연구』(김성윤, 지식산업사, 1997)
『조선후기 탕평 연구』(박광용,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4)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