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신원사 소림원 석고 미륵여래 입상 ( )

조각
작품
문화재
충청북도 공주시 신원사 소림원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미륵여래입상.
작품/불상
창작 연도
1935년
작가
김복진(金復鎭)
소장처
신원사 소림원
국가등록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국가등록문화재(2014년 10월 29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공주시
내용 요약

공주 신원사 소림원 석고미륵여래입상(公州 新元寺 少林院 石膏彌勒如來立像)은 충청북도 공주시 신원사 소림원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미륵여래입상이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사 미륵전에서 화재로 소실된 미륵대불을 재조성하기 위해 1935년 시행한 공모전에 김복진이 석고로 제작하여 제출한 축소모형 불상이다. 입찰 종료 후, 금산사에 소장되어 있다가 1940년대 중반 이후에 공주시 신원사 소림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정의
충청북도 공주시 신원사 소림원에 있는 일제강점기의 미륵여래입상.
제작 배경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사(金山寺) 미륵전(彌勒殿)에 있던 주존불(主尊佛)이 1934년 화재로 소실되어, 1935년 새 불상을 조성하기 위한 공모전을 개최하였다. 공모전은 1m 높이의 축소 모형을 제작해서 금산사에 제출하는 방식이었고, 김복진(金復鎭, 1901~1940)을 비롯하여 김보응(金普應)[보응(普應) 문성(文性), 1867~1954], 이석성(李石城), 김일섭(金日燮)[금용(金蓉) 일섭(日燮)] 등이 응모하였다.

당시 금산사의 의사 결정자는 주지였던 성열(成烈)과 불상 복원 대시주(大施主)를 자임한 가산거사(迦山居士) 김수곤(金水坤)이었다. 공모전 결과 김복진의 작품이 발탁되었다. 근대적 재료인 석고로 제작한 축소 모형의 불상이다.

내용

한국 최초의 근대적 조각가로 평가받는 김복진은 일본에서 유학한 경험을 바탕으로 석고를 활용한 조각 작품을 다수 제작하였다. 공산당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1928년부터 6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던 김복진은 1930년대부터 불교에 관심을 두고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신원사 소림원 불상은 목조나 석조, 소조 등의 전통적인 불상의 재료로 제작하지 않고, 석고라는 근대적 재료를 활용하여 제작하고 도금(鍍金)한 점이 특징적이다. 팔각 연화대좌(蓮花臺座) 위에 선 입상(立像)으로 대좌를 제외한 주1만의 높이는 1m이다.

불상의 신체 전면에 밀착된 얇은 옷을 두르고, 배를 살짝 내밀고 서 있는 모습에서 김복진이 신체 비례와 양감의 표현에 집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의 김복진이 조선 후기 불상 양식에 대한 이해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에 제작된 좌우 협시보살(夾侍普薩)과의 형식적 · 양식적 조화보다는 독립적인 불입상(佛立像) 자체의 완성된 모델링을 보인다는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서 서양식 조각을 근대적 교육을 통해 배운 김복진의 근대 조각가다운 면모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형태 및 특징

1,182㎝에 달하는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대불에 비해 크기만 작을 뿐, 전체적 형식 및 양식은 매우 유사하다. 몸을 곧게 펴고 정면을 바라보는 당당한 체구에 원만한 주2, 낮은 주3에 중간 계주(髻珠)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구부린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취하였으며, 왼손은 손바닥이 위를 향하도록 하고, 살짝 오므려 보주(寶珠)를 받쳐들고 있다.

군의(裙衣)주4 위에 주5를 한 겹으로 두른 모습인데, 넓은 양어깨를 덮고 오른쪽 가슴 앞에서 여미는 방식으로 착용하였다. 이는 통일신라 8세기 중엽 이후의 금동불(金銅佛)에서 보이는 주6 표현이다. 신체를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옷 주름이 몸에 밀착하여 허벅지를 비롯한 신체의 굴곡을 드러내는 표현도 통일신라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깊게 파인 대의 위로 노출된 가슴에 가슴의 윤곽을 표현한 것과 허리 부분의 얇은 옷 주름이 다소 번잡하게 보일 정도로 주름 간격이 좁고 몸에 밀착하여 허벅지의 양감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현은 통일신라 불상과는 다소 다른 면모이며, 일본 헤이안[平安], 가마쿠라[鎌倉] 시대의 불입상과 유사한 것이다.

일본 전국의 사찰에 소장된 이 시대의 불보살상(佛菩薩像)들은 당시 주7 간행의 『제국미술사료』 등의 화집(畵集) 시리즈를 통해 일반에 소개되어 있었다. 이러한 자료를 통해 김복진은 헤이안, 가마쿠라 시대 불상 양식을 가까이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체의 정확한 파악을 통하여 불상을 재해석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던 스승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 1852~1934] 불상의 영향도 엿보인다.

모형 미륵불상은 입찰 종료 후, 금산사에 소장되어 있다가, 1940년대 중반 이후 어느 시점에 공주 신원사 소림원으로 옮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김복진은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本尊像) 공모전에 참여하면서, 이와 거의 유사한 불입상인 「불상습작(佛像習作)」을 1936년 제15회 조선미전(朝鮮美展)에 출품하였다. 「불상습작」은 금산사 공모를 위한 상, 즉 소림원 소장 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제작한 습작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혹은 소림원 소장 불상과 동일한 작품일 가능성도 제기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1999년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 전시를 기획하며, 소림원 불상 대여를 사찰 측에 요청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에 소림원 불상을 실리콘 거푸집으로 떠서 제작한 청동제 불입상 모본(模本)을 제작하여 전시하였다. 이때 소림원 불상을 복제한 청동불입상(靑銅佛立像)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의의 및 평가

금산사 미륵전 미륵대불 제작에 앞서 시행된 공개입찰에서 낙찰된 작품으로 김복진이 대불의 축소 모형으로 제작한 불상이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몇 점 되지 않는 김복진의 작품 중 한 점이며, 근대적 기법과 재료로 전통 불상을 조형한 점에서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전통적으로 불교 조각승들이 제작하던 관례에서 벗어나 공모전을 실시하였고, 서양식 교육을 받은 근대 조각가 김복진이 참여하여 소형 작품을 제출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예이다. 2014년 10월 29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금용 일섭(1900~1975)- 근대 부처를 만들다』(국립광주박물관, 2018)
고경 감수 · 신은영 역주, 『金魚 金容日燮의 年譜』(송광사 성보박물관, 2016)
국립현대미술관 편, 『한국근대미술: 조소-근대를 보는 눈』(삶과 꿈, 1999)
윤범모 · 최열 엮음, 『김복진 전집』(청년사, 1995)

논문

윤범모, 「금산사 미륵전 불상과 김복진」(『한국불교학』 88, 한국불교학회, 2018)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주석
주1

부처의 몸.    우리말샘

주2

부처의 몸에 갖추어진 용모와 형상

주3

부처의 정수리에 있는 뼈가 솟아 저절로 상투 모양이 된 것. 인간이나 천상에서 볼 수 없는 일이므로 이렇게 이른다. 부처의 팔십수형호(八十隨形好)의 하나이다.    우리말샘

주4

허리 밑까지 내려오는 긴 겉옷. 불상이나 보살의 옷에서 볼 수 있다.    우리말샘

주5

설법을 하거나 걸식할 때에 입는 승려의 옷. 삼의(三衣) 가운데 가장 큰 것을 이른다.    우리말샘

주6

회화나 조각에서 인물의 의상에 나타내는, 파도 모양의 늘어진 형상이나 주름.    우리말샘

주7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박물관은 대한제국 황실이 1909년 11월에 서울 창경궁에 개관한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이다. 제실박물관은 1911년 2월 1일 이왕가박물관(李王家博物館), 1938년 4월 이왕가미술관, 광복 이후인 1946년에 덕수궁미술관으로 각각 개편되었다가 1969년 5월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다.

집필자
하정민(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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