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승 ()

불교
개념
‘큰 탈 것’이라는 뜻으로 소승에 대비해 중국 · 한국 · 일본 등의 한문 경전권 및 티벳불교를 총칭하는 불교용어. 마하연 · 마하연나 · 마하야나 · 상연 · 상승.
이칭
이칭
마하연(摩訶衍), 마하연나(摩訶衍那), 마하야나(摩訶夜那), 상연(上衍), 상승(上乘)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큰 탈 것’이라는 뜻으로 소승에 대비해 중국 · 한국 · 일본 등의 한문 경전권 및 티벳불교를 총칭하는 불교용어. 마하연 · 마하연나 · 마하야나 · 상연 · 상승.
연원 및 변천

‘대승(大乘)’이라고 한역한 산스끄리뜨어 ‘마하야나(mahayāna)’는 ‘큰 탈 것’을 뜻한다. 최초로 ‘마하야나’라는 단어를 쓴 경(經)은 한역 경전권에서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으로 알려진 『팔천반야경(八千般若經, Aṣṭāsahasr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임으로 미루어볼 때, 대승은 반야부의 공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역사적으로 대승은 부파 시대 이후에 발생한 신불교 운동 세력이 기존의 교단들을 비판하며 ‘소승(小乘)’, 즉 ‘히나야나(hīnayāna)’라 하고, 자신들을 ‘더 높은’ 불교로 부른 데에서 비롯되었다. 대승은 공사상과 보살사상 그리고 육바라밀 또는 십바라밀의 체계를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중국, 한국, 일본, 북 베트남 등 한역 경전권의 불교와 티벳불교를 통칭한다.

내용
  1. 대승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이론

대승의 출현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론이 있으나 크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붓다의 대열반 약 1백년 후에 열렸던 서인도의 상좌부(上座部)와 중인도의 대중부(大衆部)의 분열로 대표되는 2차 결집 또는 근본 분열 이후 부파불교 시대의 교학의 발전을 대승 발생의 원인으로 보는 경우다. 일반적으로 이 부파불교의 시대는 약 18 또는 22개의 부파들이 전인도에 산재하며 각자의 독특한 붓다의 가르침인 법(法, dharma)에 대해서 치밀한 해석, 즉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을 추구하던 시대로 불린다.

불교의 탄생지인 중인도에서 서인도와 서북인도로 분파해간 상좌부의 경우 유부(有部)·경량부(輕量部) 등으로 더욱 분파해갔으며 이 부파들의 전통은 현재 한역 및 티벳 대장경에 자세히 남아 있다. 중인도에서 남인도로 분파해간 대중부의 경우 ‘초월적 존재로서의 붓다’, 즉 ‘출세간적인 존재(lokottara)’로 붓다를 여겼다. 이 때문에 한역의 ‘설출세부(說出世部, Lokottaravāda)’로 알려진 이 부파를 비롯해 대중부의 각 부파들은 법신(法身)·보신(報身)·응신(應身)의 삼신설(三身說)을 발달시켰다.

이 때 등장한 개념인 보살을 대승의 맹아로 보는 이 이론은 초기 불전 연구를 논할 때면 빠뜨릴 수 없는 라모트(E. Lamotte)와 더뜨(N. Dutt)의 학설이다. 더뜨는 대승의 특징을 보살 개념, 바라밀(波羅蜜)의 수행, 보리심의 개발, 정신 작용의 십지(十地), 불성의 성취, 삼신(三身)의 인정, 법무아의 개념, 법개(法皆) 또는 여성(如性)’ 등으로 정의했다. 그가 대승의 특징 첫 번째를 보살 개념으로 삼았던 만큼 대중부에서 대승의 기원을 찾고 있으나 그의 이론에는 반야부의 공사상이 빠져 있는 결정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두 번째는 유행(遊行) 승려와 재가자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불탑 신앙자’에 의한 신불교 운동을 대승의 출발로 꼽는 경우다. 이 이론은 한 때 ‘대승비불설’을 주장했던 일본에서 출발한 것으로 교조적인 부파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신불교 운동이 일어났으며 그 결과 대승이 출현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불탑뿐만 아니라 보리수·종묘(宗廟)·석굴 등의 다양한 뜻을 가진 산스끄리뜨어 ‘짜이뜨야(Caitya)’에 대한 숭배가 불교 이전의 관습으로 불교도들뿐만 아니라 자이나교도들에게도 성행하였고, 오늘날 남방의 상좌부에서도 융성하고 있으며 이 불탑에 대한 관리, 즉 재산권이 재가자 조직에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 이론의 한계는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불교학의 영향 하에 놓여 있는 한국에서는 아직도 이 이론을 대승 발생의 주요 이론으로 꼽고 있다.

‘제다산부(制多山部)’로 한역한 대중부의 ‘짜이뜨야바다(Caityavāda)’를 과대 해석한 약점이 눈에 띄지만 이 이론의 가장 큰 장점은 유행 승려의 존재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붓다의 재세시의 유행 ‘상가(僧伽, saṃgha)’에서 정주 상가로 변한 이후에 전통적인 승원 교육을 받아 교학에 능통하지만 승원의 계율(戒律)에서 자유스러웠던 이 유행 승려들은 인도 특유의 우빠니샤드(Upaniṣad) 전통, 즉 ‘진리의 말씀’이라는 베다(Veda)에 대한 자유로운 해석 전통에 충실한 자들로, 이들이 당대 부파들의 교조적인 아비달마 전통에 반기를 들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불교의 발생지인 중인도나 근본 분열 이후 상좌부의 본거지가 된 서인도 이외의 지역, 즉 대중부의 본거지인 남인도와 실크로드 선상에서 선악의 이분법을 최초로 도입한 조로아스터교의 영향 하에 있던 북인도 등 인도의 전통 문화 중심지의 변방에서 발생하였을 것이 유력하다. 큰 뱀을 뜻하지만 ‘용(龍)으로 한역된 ‘나가(Nāga)’ 숭배 사상이 일반적이었던 남인도나 알렉산더의 서북인도 침공(B.C. 327) 이후 외세에 대항 의식이 생겨났을 북인도 등지에 전래되었던 불교는 지역적,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서 활발하게 현지화 되었을 것이고 이 가운데 대승이라는 새로운 불교가 출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두 이론의 특징을 총합하면 대승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보살사상과 공사상이 부파불교 시대의 끝 지점인 기원전 2세기 무렵 승단 내외에서 발생하게 된 역사적인 맥락이 드러난다. 즉, 붓다를 초월적인 존재로 보는 보살사상과 아비달마 교학에 대한 비판으로 등장한 공사상을 바탕으로 대승이 출현한 것이다. 이것은 기원전 4세기 경 빠니니(Pāṇini)에 의한 고전 산스끄리뜨어(Classical Sanskrit) 문법 완성 이후 다양한 시가(詩歌, kāvya)들의 창작, 집필이 이루어지고 그 가운데 다량의 불전 문학과 대승경들이 집필된 시대적 배경과도 상통한다.

  1. 대승의 특징

2-1. 바라밀 수행과 계율 문제

대승 이전의 불교의 가르침을 총합한 것은 사념처(四念處)[사념주(四念住)]·사정단(四正斷)[사정근(四正勤)]·사신족(四神足)[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칠각분(七覺分)]·팔정도(八正道) 등 총 7종의 37가지로 이루어진 삼십칠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으로, 이것은 개인적 수행의 지침으로는 유효하기 때문에 대승에서도 통용된다. 그러나 이 수행법들을 총합해 보아도 공동체적인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대승 수행은 곧 보살의 이타행을 실천하는 것으로 그 결정체는 육바라밀 수행이다.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 등 총 6종으로 이루어진 ‘피안(彼岸)으로[pāraṁ] 건너가는 것[itā]’, 즉 ‘[고뇌의 육도(六道) 너머 깨달음의] 피안(彼岸)으로 건너가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한역으로 ‘바라밀다波羅蜜多)’로 음차한 것을 축약한 바라밀 수행의 첫 번째는 보시, 즉 ‘베푸는 것[dāna, 음차 檀那]’이다. 이것은 부파불교 시대까지 이어져온 개인의 수행을 전체 사회로 그 눈을 돌렸다는 점에서 가히 혁명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이 보시 바라밀은 재시(財施)·법시(法施)·무외시(無畏施)의 3종 보시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꼽는다. 재시는 재가 신자들의 승단을 위한 경제적 지원, 법시는 이에 대한 승단에서의 가르침을 베푸는 것, 그리고 무외시는 보살이 중생을 두루 살피는 경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와 같은 3종 보시는 ‘계(戒)’를 통해서 전인도에 걸친 느슨한 통일 조직을, 그리고 ‘율(律)’을 통해서 이 통일성을 어겼을 경우 처벌할 수 있는, 즉 근본 분열의 원인이었던 출가자들의 공동체인 상가의 계율 문제를 넘어 재가자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불교 공동체인 상가와는 확연히 다른 목적의식을 담고 있다.

재가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인정하고 있는 이 3종 보시를 전면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대승이라는 신불교 운동의 영향뿐만 아니라, 붓다의 제세시인 서기전 5세기 경 우빠니샤드를 재해석한 육사외도(六邪外道)에 의해 패퇴를 맞보았던 브라흐만교가 대중친화적인 힌두교로 재탄생할 때 불교 또한 재가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할 필요성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불교와 힌두교의 경쟁 체제 속 재가자들의 권위 상승으로 인해서 『범망경(梵網經, brahmajāla sūtra)』의 죽이지 말라[不殺戒], 훔치지 말라[不偸盜戒], (그릇된) 음행을 범하지 말라[不婬戒] 등의 십중금계(十重禁戒)와 술 마시지 말라, 고기 먹지 말라 등의 사십팔경계(四十八輕戒)에서 보이듯, 대승에서는 이전에 미분화된 계율 대신에 포괄적인 계율을 취하게 된다. 섭율의계(攝律儀戒)·섭선법계(攝善法戒)·요익유정계(饒益有情戒)의 삼취정계(三聚淨戒)로 상징되는, 즉 계율을 지키고 선법을 닦고 중생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포괄적인 대승계는 출가자들뿐만 아니라 재가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이 계율의 변화는 불교의 해외 전파 때 각 지역의 민간 신앙을 흡수, 통합하면서 현지 사정과 조화를 이루는 불교를 낳는 긍정적인 효과로 작용하기도 했으나 더더욱 느슨해진 상가, 즉 불교 공동체가 오늘날처럼 각 지역에 따라 제 각각의 이질적인 모습을 띄게 만드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2-2. 불교 인식론의 확장

부파불교의 정교한 교학 분석의 결정체가 ‘법에 대한 분석’, 즉 아비달마였던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정교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다. 붓다의 법문이라는 경장(經藏), 상가를 지키기 위한 규칙인 율장(律藏), 그리고 불법에 대한 해석인 논장(論藏) 등의 삼장(三藏), 또는 대장경에서 논장을 발달시킨 것이었다.

부파불교도들의 교학적인 태도가 ‘고통에서의 해방’, 즉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는 불법의 근본적인 목적에 직접적인 해답을 줄 수 있는지에 의심을 품은 반야부의 경장을 지었던 이들은 불교 인식론의 근간을 이루는 오온(五蘊, pañca skandha) 십팔계(十八界, aṣṭādaśa dhātava)를 ‘공(空, śūnya)’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분석적 태도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은 이후 대승의 중관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공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불교의 구축적(constructive) 인식론의 반(反)/비(非)-구축적(de-constructive) 인식론의 출현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구사론자들의 ‘불철저한’ 분석을 좀 더 심도 깊게 논의한 것은 대승의 유식사상으로, 유식사상은 오위칠십오법(五位七十五法)으로 대별되는 법에 대한 분석을 오위백법(五位百法)까지 밀고 나갔다. 이것은 ‘구사-인명(因明, 불교 논리학)-유식’이라는 불교의 구축적 인식론의 완성을 뜻한다.

현대 불교학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까루빠하나(D. J. Kalupahana)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차용한 이와 같은 ‘구축적과 반/비-구축적’ 역사를 통해서 대승사상은 중관파와 유식파가 결합하는 불교 인식론의 완성을 이룩하였다.

부파불교의 법에 대한 분석을 부정하는 반야부의 공사상은 산스끄리뜨어의 부정어인 ‘나(na)’ 또는 부정 접두어인 ‘아(a-)’ 또는 ’안(an-)’을 붙여 일체의 개념들을 모두 ‘(그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밝힌 것은 중관사상의 시조(始祖) 용수(龍樹, Nāgārjuna: 150~250)로, 그는 그의 대표저작인 『중론(中論, Madhyamaka śāstra)』을 포함한 제 저작들에서 ‘열반, 인과, 업’ 등의 불교의 근본 개념들마저도 고정불변의 실체를 가진 것, 즉 자성(自性, svabhāva)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논파했다.

산스끄리뜨어로 ‘존재’를 뜻하는 ‘바바(bhāva)’와 그것의 부정어인 ‘아바바(abhāva)’를 한역 경론에서는 ‘유(有)’와 무(無)‘로, 티벳 경론에서는 ’외빠(yod pa)’와 ‘메빠(med pa)’ 등 대칭적인 개념으로 옮겨, 이와 같은 부정적인 자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지 않지만 산스끄리뜨어의 언어학적인 특징에 따른 이 부정주의 정신은 공사상으로 대별되는 중관사상의 기본적인 특징을 이루었다. 이것은 연기사상을 통해 아(我, ātman)를 부정하고 무아(無我, anātman)를 근간으로 삼는 붓다의 가르침을 다시금 환기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대승불교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용수가 그의 출생과 활동지역인 남인도를 중심으로 반야부의 영향 하에서 대승사상을 발전시켰다면 유부 구사론자의 활동지역인 북인도에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Mahāyāna saṃparigraha śāstra)』의 저자인 무착(無著, Asaṅga: 4~5세기?) 등이 출현하여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śa śāstra)』 등에서 다루지 못했던 주제들을 더욱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이 유식사상의 발달로 인하여 업과 윤회를 바탕으로 한 인도 전통 문화에, 특히 윤회의 주체를 ‘어떤’ 아(我)로 보는 힌두교와의 대치점에 놓여 있던 불교에, 제팔식(第八識)인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 sarva bīja vijnāna)을 뜻하는 ‘아뢰야식(阿賴耶識, ālaya vijñāna)’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윤회의 주체가 바로 이 팔식(八識)이라는 새로운 이론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힌두교도의 공격의 대상이 되었던 불교에서의 윤회의 주체 문제는 해결되었다.

이 밖에도 유부와 경랑부 간의 논쟁의 주제였던 ‘근본 물질(paramāṇu)’, 즉 ‘극미(極微)’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대승의 유식사상에서는 인식주체인 식(識)에 의해서 반영된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리고 중관사상에서는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식대상 등을 정의하여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그리고 그 사이의 반영이 결코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는 연기사상을 재확인하였다.

한역에서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정의할 때 대표적인 예로 드는 소승의 ‘아공법유(我空法有)’는 인식주체의 변화, 즉 연기성을 인정하는 것이지만 인식대상을 고정하지 않을 경우 그것을 분석할 수 없다는 점에서, 즉 인식대상의 연기성, 그 변화성을 제한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대승의 유식사상에서는 ‘인식주체에 의해 반영된 존재’를 뜻하는 ‘형상(形相, ākāra)’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내어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그리고 그 사이의 반영에 그침 없는 작용, 즉 연기성까지 염두에 두었다.

더 나아가 중관사상의 사조 용수가 그의 대표적인 저작인 『중론』,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362(24-18)]번 게송에서 ‘연기인 그것/ 바로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에 의지하여[緣] 시설(施設)된 것[=假名]/ 그 자체가 바로 중도(中道)이다’라고 주장한 것처럼, 그리고 한역 경전권에서 대승은 ‘아공법공(我空法空)’이라 명쾌하게 정의한 것처럼, 대승에서는 소승에서 제한한 인식대상의 연기성를 회복시켜주었다.

  1. 역사적 발전

불교 논리학[因明]은 그 구축적 성격으로 인해 원래 구사론의 맥을 잇는 것으로, 『정리문론(正理門論, Nyāya dvāra tarka śāstra)』 등의 저자 진나(陳那, Dinnāga: 480∼540)의 등장 전후를 기점으로 삼아 구(舊) 인명과 신(新) 인명의 시대로 나뉜다.

시대적으로 이때는 경쟁관계에 있던 힌두교의 육파 철학의 하나인 니야야학파(Nyāya, 正理學派)의 소의 경전인 『니야야 수뜨라(Nyāya sūtra, 正理經)』가 완성된 이후로 인도 논리학이 비약적으로 발달하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관통하면서 중관학파에서는 『반야등론(般若燈論, Prajña pradīpa)』 등의 저자인 청변(淸辯, Bhāvaviveka, 또는 Bhavya: 500570)이 등장하여 인명을 도입하여 중관사상을 해석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의 이와 같은 논리적, 구축적인 『중론』에 대한 주석은 『명구론(明句論, Prasannapadā)』 등의 저자 월칭(月稱, Candrakīrti: 600650)에 의해서 비판받는다.

청변과 월칭의 대치점은 이후 스와딴뜨리까(Svātantrika, 자립논증)와 쁘라상기까( Prāsaṅgika, 귀류/귀결논증?)라는 중관사상의 두 조류로 알려졌는데 티벳불교에서는 용수의 부정주의와 비판 정신을 계승한 것을 후자로 꼽는다. 이와 같은 중관사상의 변화는 ‘논리학의 시대’를 경과하며 구축적인 불교 인식론과 비구축적인 불교 인식론이 조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대승의 두 사상은 『중관장엄론(中觀莊嚴論, Madhyamakālaṃkāra kārikā)』 등의 저자 적호(寂護, Śāntarakṣita: 725~788)의 유가행 중관파((瑜伽行 中觀派, Yogācāra Mādhyamikas)를 통해서 수행적 측면에서는 요가, 즉 유식적 입장을 그리고 인식론에서는 중관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여래장(如來藏, tathāgata garbha) 사상이 새롭게 대두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의 개발이라는 목적의식이 명확한 티벳불교와 달리 대부분의 한역 경전권의 종파들에서는 여래장을 강조하고 있다. 초기 경론들에 등장하지 않는 이 개념이 불성의 개발이라는 논리적 확장에서 비롯된 것인지, 힌두교의 영향인지, 아니면 인도 문화 외적인 요소가 불교 내로 유입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 밀교의 발생과 대승의 사멸

일반적으로 불교학자들은 불교의 역사를 원시·부파·대승·밀교(密敎)의 4종으로 나누고 부파불교를 소승이라 부르는 대승이 출현하고 그 교학 체계를 이으며 제례 의식과 신앙 활동을 강조하는 밀교가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붓다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던 성문(聲聞, śrāvaka), 그리고 스스로 깨달았던 연각(緣覺 또는 獨覺, pratyeka buddha) 이후에 보살승(菩薩乘) 등 3승(三乘)으로 나눌 때, 성문·연각은 소승으로 그리고 보살승은 대승으로 분류한다. 그리고 이 대승을 둘로 나눠 ‘드러난 가르침’을 ‘현교(顯敎)’라 부르고 ‘감추어진 가르침’을 ‘밀교(密敎)’라 부른다. 밀교의 등장에 대해서는 몇몇 학설들이 있으나 신불교 운동을 통하여 법에 대한 분석에 몰두하던 부파불교에 반대하여 대승이 출현했던 것처럼, 신인명의 시대를 관통하면서 교학에 다시 빠져드는 대승 현교에 반대하여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한역 경전권에서는 이 밀교를 밀교 3부경이라는 『대일경(大日經, Mahāvairocana sūtra)』, 『금강정경(金剛頂經, Sarvatathāgata tattva saṃgraha sūtra)』, 그리고 『소실지경(蘇悉地經, Susiddhi sūtra)』의 집필 또는 집경 전후를 통해서 잡밀(雜密)과 순밀(純密) 등 2종으로 나누거나 만다라의 형태에 따라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 등 2종으로 나누는데 반해서 티벳에서는 끄리야 딴뜨라(kriyā tantra, 作)·짜르야 딴뜨라(caryā tantra, 行)·요가 딴뜨라(yoga tantras)·무극상 요가 딴뜨라(anuttara yoga tantras) 등 4종으로 분류하고 유부·경량부·유식·중관 등의 4종의 불교 교학과 배치하고 있다.

인도 밀교의 흥성은 불교와 경쟁 관계에 있던 힌두교의 육파 철학 가운데 정점을 찍은 베단따 학파의 불이론(不二論, advaita, non-dualism)을 주장한 샹까라(Śāṃkara: 788~820)가 중관사상의 영향으로 고정불변한 실체라는 ‘아뜨만(我, ātman)’을 해체한 이후 인도 양대 종교의 명확한 대치점이 사라진 것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인도 철학사를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라다끄리쉬난(S. Krishnan)이 언급한 이 ‘교감어린 경쟁(friendly competition)’의 해체는 곧 인도 인식론의 발전에 종지부를 찍으며 양대 세력들 간의 문화적 공유를 불러왔다. 그 결과 불교의 밀교가 행하는 거의 모든 제례 의식이 힌두교의 밀교와 겹치는 결과를 낳았다.

상호경쟁 체계가 해체된 인도의 인식론은 중앙아시아 회교도의 침공 이후 더 이상 활기를 찾을 수 없게 되었으며 12세기 빠알라(Pāla) 왕조(812 세기) 멸망 이후 인도 불교는 결정적인 패퇴를 맞이하였다. 인도 중세에 걸친 회교도 왕조에도 생존한 힌두교와 사멸한 불교와의 차이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들이 있으나 빠알라 왕조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던 나란다(Nālandā) 승원(512 세기)의 멸망에서 보이듯, 중앙아시아 회교도의 남하에 저항의 구심점을 형성할 수 있었던 상가의 궤멸, 즉 사원 약탈과 출가자 학살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다수의 승려들이 티벳으로 망명한 결과, 오늘날 티벳불교의 최대 종파인 게룩빠(dge lugs pa, 黃敎)에서는 나란다 전통을 자신의 법맥이라고 강조한다.

현황 및 의의

대승은 비록 인도에서 사라졌으나 이후 한역 경전권과 티벳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고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기원 전후 실크로드의 카라반들을 통해 소개되었던 중국불교는 유부·경량부의 본거지인 북인도를 지나 조로아스터교의 본거지인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북부와 우즈베키스탄의 남쪽, 타지키스탄의 서북쪽인 박트리아 지방을 경유하는 동진(東進) 루트를 밟았다. 그리고 최소한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7세기 이후 히말라야 산맥 너머 티벳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기본적으로 대승인 한역 경전권의 ‘필터 역할’을 했던 중국불교는 선비족(鮮卑族)의 탁발부(拓跋部)가 세운 북방의 패자 북위(北魏, 386∼534)를 통해서 비한족 왕조의 권위를 위해 국가 이념으로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티벳불교는 최초의 중앙 집권 왕조를 연 쏭쩬 감뽀(srong btsan sgam po: 605?~649)가 지방 할거 토호들의 원시 종교인 뵌교[bon]를 제압하고 중앙 권력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도입되었다. 이후 한역 경전권의 대승은 다양한 변조를 겪다 근대의 정교분리의 원칙에 따라 그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였으나 중국, 한국, 일본 등 각국의 전통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국가 이념으로 도입된 대승이라는 현상은 티벳에서 더욱 심하게 나타났는데 전전기(前傳期, 79세기)의 티벳 왕조와 결합한 닝마빠(rnying ma pa), 후전기(後傳期, 10세기)의 원나라와 결합한 싸꺄빠(sa skya pa), 명나라와 결합한 까뀌빠(bka' brgyud pa), 북방의 몽고와 그리고 청나라와 결합한 게룩빠 등 4대 종파가 모두 국내외의 국가 권력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후전기 중국 역대 왕조와의 긴밀한 정치적 관계 때문에 1959년 티벳을 대표하는 14대 달라이 라마의 인도 망명 이후 ‘티벳이 중국의 일부였느냐, 독립국이였느냐?’라는 커다란 과제를 남겼다.

한역 경전권의 대승은 각각의 종(宗)과 그 종에서 갈라져 나온 ‘파(派)’로 발전했으며 각 종파들마다 각자의 소의경전(所依經典)들을 종지(宗旨)로 삼았다. 예를 들어 화엄종은 『화엄경(華嚴經, Mahāvaipulya sūtra)』, 천태종은 『법화경(法華經 또는 妙法蓮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을, 남선종은 『금강경(金剛經, Vajracchedikā sūtra)』을, 그리고 북선종은 『능가경(楞伽經, Laṅkāvatāra sūtra)』을 소의경전으로 삼았다. 이와 달리 현밀쌍수(顯密雙修)를 강조하는 티벳불교는 자기 종파의 정당성 강화를 위한 주석 작업을 활발하게 진행하여 고도로 발달한 불교 인식론을 오늘날까지 남겼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인 372년에 최초로 불교가 전래된 한역 경전권의 한국불교도 예외가 아니라서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시대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에 의해 그 절대적 지위를 상실하기 전까지 국가 이념의 지위에 있었으며 다양한 민족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또한 중국의 종파불교의 영향 하에 있었던 관계로 삼국시대 이래 오교구산, 오교양종, 선교양종 등의 다양한 종파들이 출현하다 선불교로 수렴되었으나 일승불교(一乘佛敎)를 주장한 원효(元曉: 617~686)처럼 화쟁사상을 주장한 경우도 있었다. 오늘날의 이 화쟁사상은 종파, 종교 간의 화합뿐만 아니라 남방의 상좌부 전통에서 강조하는 위빠사나 수행[觀法]과 티벳불교의 현밀쌍수 전통을 받아들여 불법을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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