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념(一念)은 산스크리트어 eka-citta의 번역으로 극히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는 생각(念)의 단위이다.
불교 심리 이론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의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마음이 대상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 기관[根], 인식 대상[境], 인식[識]의 순간적인 결합에 의해 생겨났다가 곧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렇듯 생각이 일어나는 한 순간을 시간의 단위로 삼은 것이 바로 '일념(一念)'이다. 다만 구체적인 시간 단위에 대해서는 불전마다 다양한 설이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는 “1탄지(彈指)는 60념으로 이루어져 있다”, "시간의 단위 중 가장 짧은 것은 60념 중 일념이다"라고 하였다. 중국 찬술 경전인 『인왕반야경(仁王般若經)』에 의하면 "90찰나가 일념이고, 일념 가운데 1찰나가 9백 생멸(生滅)을 경과한다"라고 하였다. 담란(曇鸞, 476542)이 찬술한 『왕생론주(往生論註)』에서는 "101가지 생멸을 1찰나라고 부르고, 60찰나를 일념"이라고 하였다. 법장(法藏, 643712)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한 찰나가 바로 념이고 1탄지(彈指)는 60념이다"라고 하여 찰나와 일념을 동일하게 해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한역 경론에서 '일념(一念)'은 종종 산스크리트어 ‘kṣaṇa’(찰나)의 번역어로 사용된다.
일념은 정토사상에서도 수행론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량수경(無量壽經)』에서 "어떤 사람이 저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 수 있어서 환희용약하기를, 나아가 일념이라도 한다면, 이 사람이 큰 이익을 얻고 위없는 공덕을 구족함을 알아야 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 맥락에서 일념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염불 수행, 즉 칭념(稱念)의 의미로 사용된다. 즉 부처의 명호를 한 번 외는 염불 수행을 일념이라고 한 것이다. 즉 일념 동안만이라도 아미타불을 제대로 믿고 이해하며 불법을 들으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일념이 사용될 경우 수행을 위해 집중한 상태라는 의미가 강하다. 오늘날 우리말이나 일본어에서 일념을 ‘한 가지에 집중한 마음’ 즉 일심(一心)으로 이해하는 것은 이러한 염불 수행의 관점에서 해석된 일념의 의미와 잘 연결된다.
특히 동아시아의 대승불교에서는 일념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확장했다. 중국 찬술 논서인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는 일념과 상응하는 번뇌, 일념과 상응하는 지혜라는 해석을 통해서 '수증론'을 전개하였다. 천태종은 세계의 모든 법이 다 일념에 갖추어져 있다는 ' 일념삼천(一念三千)'을 제시하였다. 화엄 논사인 의상(義湘, 625~702)은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서 "무량한 시간이 일념이고 일념이 곧 무량한 시간[無量遠劫卽一念/一念卽是無量劫]"이라 설하여 순간과 영원에 가까운 시간의 상즉(相卽)을 설하였다. 일념에 대한 이러한 사유 방식은 선종에 이르러 "일념이 정념(正念)이고 무념(無念)"이라는 주장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일념은 문헌에 따라 한 순간의 마음이 아닌 '최초의 마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돈황사본 P.2908에서 "삼계(三界)의 바깥에서 일념(一念)의 신식(神識)이 홀연히 일어났으나 어디에서 온 것인지 알 수 없다[三界外一念神識, 忽爾而起, 莫知所從]"라고 한 것이 그 예이다.
일념은 극히 짧은 순간의 인식을 의미하지만, 불교적인 의미에서 시간과 공간은 모두 이 일념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삼천의 모든 법이 일념에 갖추어져 있다'는 천태종의 주장이나 '일념이 무량겁과 같다'는 화엄종의 주장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일념은 '마음을 온전히 한곳에 집중하는 의식'이라는 의미에서도 사용되는데, 이것은 현재의 순간과 현재의 삶 자체에 온전하게 집중할 것을 추구하는 불교 특유의 수행법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