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금원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의용대 의무과장, 한국광복군 군의관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이칭
이명
한승찬(韓承贊)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4년 10월 20일
사망 연도
1949년 5월 15일
출생지
평안북도 의주
주요 경력
한국광복군|의사
대표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1990)
내용 요약

한금원은 일제강점기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8년 10월 10일 조선의용대 창설 당시 현장에 있었으며, 군의로 활동하였다. 1942년 한국광복군에서도 의사로서 활동하였다.

정의
일제강점기 일본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의용대 의무과장, 한국광복군 군의관 등의 활동을 전개한 의사이자 독립운동가.
인적 사항

한금원(韓錦源)은 1904년 평안북도 의주(義州)에서 태어났다. 1934년 도쿄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고향인 의주에서 개업하고 있던 중 중국으로 망명한 친형 한철(韓哲)과 연락되어 국내에 파견된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주요 활동

1934년 5월에서 1938년 6월까지 중국 후베이성〔湖北省〕 한커우〔漢口〕에 정착하여 한철 부부와 합류하고 형수인 김영란(金英蘭)이 경영하던 박애병원(博愛病院)에서 의료사업에 종사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된 뒤에는 광시성〔廣西省〕 구이린〔桂林〕에서 조선의용대 의무조장(醫務組長)으로 활동하였다.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 제1지대(第1支隊)로 편입된 후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제1지대의 의무주임으로 활동하였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시준, 『한국광복군 연구』(일조각, 1993)
『독립유공자공훈록』 5(국가보훈처, 198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4권, 제6권(고려서림, 198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5(탐구당, 1968)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독립문화사, 1966)
주석
주1

1937년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에서 비롯되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진 전쟁. 일본이 중국 본토를 정복하려고 일으켰는데 1945년에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끝났다.    우리말샘

주2

1931년 류탸오후 사건(柳條湖事件)을 계기로 시작한 일본군의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에 대한 침략 전쟁. 일본의 관동군(關東軍)은 둥베이 삼성(三省)을 점령하고 이듬해 내몽골의 러허성(熱河省) 지역을 포함하는 만주국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은 그 뒤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주용(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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