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는 광복 이후 「생태」 등을 그린 화가이다. 일본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유학하고 1943년,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1951년 수십 마리의 뱀이 뒤엉킨 모습의 「생태」로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1960년대에 설화와 상상의 세계를 거친 마티에르 효과를 내는 등의 기법으로 표현했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화려하고 낭만적인 여성인물화를 완성하였다. 천경자는 자전적인 주제와 화려한 채색 기법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고 전통적인 한국화의 범주에서 벗어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
천경자는 1924년 전라남도 고흥에서 천성욱(千性旭)과 박운아(朴雲娥)의 1남 2녀 중 큰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천옥자(千玉子)이다. 1941년 ㅔ광주공립여자고등보통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한 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천경자’로 이름을 바꾸었다.
천경자는 인물화가인 고바야가와 기요시(小早川淸, 1899~1948)의 문하에 들어가 인물화를 익혔고,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각각 「조부(祖父)」(1943)와 「노부(老婦)」(1943)로 입선하였다. 1943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이듬해에 귀국하였다. 1946년 모교인 전남여고 미술교사로 부임하여 학교 강당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9년 서울에서 개인전을 치르면서 장래가 촉망되는 여류화가라는 평가를 받았고 조선대학교 미술과 강사로 임용되었다. 이 무렵 동생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삶의 역경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뱀과 인골(人骨)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는데, 수십 마리의 뱀이 뒤엉킨 모습의 「생태(生態)」(1951)는 화단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54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용되어 새로운 한국화를 모색해 나갔고, 1963년 도쿄 개인전을 계기로 일본에도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1974년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사퇴한 뒤 작품 제작에만 전념하였는데, 이 무렵 자전적인 성격의 단독 여인상들을 제작하여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확립하였다.
한편, 1969년 유럽과 남태평양을 여행, 1972년 베트남전 종군화가단 참여, 1974년 아프리카 여행 등 1990년대까지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이국적인 풍물화를 신문과 잡지에 연재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인 「미인도」를 둘러싸고 미술관과 진위 논란이 불거졌고, 이 사건을 계기로 절필을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1995년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 1998년 서울시에 작품 93점을 기증하면서 서울시립미술관에 ‘천경자 상설전시실’이 설치되었고, 2002년 서울시립미술관 신축개관 기념전으로 ‘천경자의 혼’이 개최되었다. 2015년 미국에서 타계하였다.
천경자는 초기에는 일본 채색인물화풍의 영향을 받은 인물화를 제작하였고 사생적인 화풍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일본화풍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수묵화풍이 화단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국전 참가를 거부하고 새로운 화풍을 모색하였다. 특히, 1957년 전통회화의 다양화를 모색하였던 백양회(白陽會)와 서양화가들의 단체인 모던아트협회 등에 가담하면서 소재, 주제, 기법 면에서 다양한 실험을 하였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현실세계에서 벗어나 설화와 상상의 세계를 초현실적인 분위기로 표현하기 시작하였고, 안료를 두텁게 발라 거친 마티에르 효과를 내는 등 과감한 변화를 시도하였다. 또 해외 여행을 통해 이국적인 풍취를 수용하고 과슈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한국화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여성화가로서의 자의식이 표현된 단독 여인상들을 제작하면서 천경자 특유의 화려하고 낭만적인 여성인물화를 완성하였다.
천경자는 대다수의 한국화가들이 수묵화에 경도될 때에도 채색화 작품을 지속하였고, 추상화가 화단을 장악할 때에도 구상적인 작품세계를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화단에서 강렬한 색감과 문학적 서정을 토대로 독자적인 양식을 완성한 작가로 평가된다.
천경자는 문학에도 관심이 깊어서 신문과 잡지에 꾸준히 글을 발표하였고, 첫 수필집 『여인소묘(女人素描)』(1955)를 비롯하여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 오직 붓과 종이만 의지하고』(1972),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1978), 『탱고가 흐르는 황혼』(1995) 등 총 18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였다.
1955년 제7회 대한미협전에서 「정(靜)」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였고, 국전에서 「추정(秋庭)」으로 특선상을 수상하였다. 1971년에 서울시 문화상(예술부문), 1975년에 3 · 1문화상(예술부문)을 받았다. 1983년에는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2016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1주기 추모전: 바람은 불어도 좋다. 어차피 부는 바람이다.’를 전시 개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