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 ()

민속·인류
개념
전통시대에 출산 후 배출된 태를 일정한 장소에 묻는 행위를 가리키는 민속용어. 매태(埋胎).
이칭
이칭
매태(埋胎)
정의
전통시대에 출산 후 배출된 태를 일정한 장소에 묻는 행위를 가리키는 민속용어. 매태(埋胎).
개설

장태(藏胎)란 여성의 출산 후에 배출되는 태(태반과 탯줄을 총칭함)를 함부로 버리지 않고 일정한 격식을 갖추어 땅에 묻는 행위를 말한다. 매태(埋胎)라고도 한다. 1980년대 병원 출산이 일반화되기 이전까지 한국인들이 태를 처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다. 태를 땅에 묻는 방식 이외에 불에 태우거나[燒胎], 물에 띄워 보내기도[水中棄胎]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태를 불에 태우는 방식을 가장 선호하였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과 같은 지역에서는 아기가 병이 났을 때 약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태를 말려서[乾胎] 보관하기도 하였으나 보기 드문 사례이다.

태를 땅에 묻는 장태는 왕실이나 양반과 같은 특정 신분 계층에서 선호하던 태 처리 방식이었다. 자궁 속 태아를 길러 낸 태를 소중히 여기던 전통시대의 생명 사상과 태와 태 주인의 운명을 동일시하며 태를 잘 처리하면 태 주인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사고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가와 사가에서는 태 주인의 무병장수와 입신양명을 간절히 바라며 좋은 땅을 골라 태를 묻었다.

연원 및 변천

한국인의 태에 관한 문화적 관념은 예로부터 태를 소중하게 여기는 문화 전통과 관련되며, 이는 태를 처리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중국 송대의 의서인 『부인대전양방(婦人大全良方)』과 중국 명대의 의서인 『의학입문(醫學入門)』에서는 임신 3개월이 되어야 ‘시태(始胎)’라고 하며, 이때 비로소 태아(胎兒)의 형상이 갖추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이 시기는 코와 생식기가 뚜렷이 구별되면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이 생기기 시작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자궁 속 인간 생명체를 대상으로 하는 태중 교육인 태교(胎敎)도 임신 3개월부터 시작하였고, 임신 기간인 10개월을 1년으로 환산하여 신생아에게 1세의 나이를 부여하는 한국인의 나이 세는 방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현대 의학에서도 태아의 생존과 성장에 반드시 필요한 태반(胎盤: placenta)이 잉태 4주에서 9주 사이에 만들어지며, 영양 공급, 가스 교환, 노폐물 배출, 호르몬 생산 등 태아와 모체 사이에 필요한 물질 교환을 매개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고하였다. 태반의 평균 길이는 18.5㎝, 두께 2.3㎝, 부피는 497㎖, 무게는 508g이며, 탯줄은 직경이 1~2.5㎝ 정도이고, 길이는 50~60㎝이다. 일반적으로 “태를 묻는다”고 했을 때, 태는 태반과 탯줄을 지칭한다.

태반은 전통시대에 포의(胞衣) 또는 태의(胎衣)라고 하였다. 포의는 태의 일부를 구성하며, 자궁 안에서 태아와 탯줄로 연결되어 엄마를 매개로 태아를 기르는 실질적인 역할을 한다. 포의는 여성의 출산 후에 탯줄이 끊어짐으로써 신생아와 분리된 후 독립적으로 남겨진다. 태에서 자라나 인간의 형상을 갖춘 다음 자궁 밖 인간 세상으로 나온 신생아는 사회 안에서 길러지는 반면, 자궁 안에서 인간 생명체를 길러 내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였던 태, 즉 포의는 신생아의 사회적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처리되었다. 예를 들면, 왕실 자녀의 태는 좋은 땅을 선정하여 태실(胎室)을 조성하고, 정교하게 고안된 장태 의례를 행한 후에 영원히 안치하였다.

태를 묻는 장태 행위에 대한 최초의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 등장한다. 김유신(595~673)의 태를 높은 산[高山]에 묻고, 태령산(胎靈山)이라 불렀다는 내용이다. 현재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문봉리의 태령산 정상에 김유신의 태실 유적이 남아 있다. 김유신의 장태 사례를 통해 태를 묻는 장태 문화의 기원이 6세기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감을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인간의 출생과 관련하여 태에 대한 구체적인 관념과 신앙이 존재하였으며, 신분이 귀할수록 태를 함부로 처리하지 않고 특정한 장소에 묻었던 것이다.

고려의 과거제도 중 지리학을 선발하는 시험 과목에 『태장경(胎藏經)』이 포함되었고, 고려 왕실에서도 장태를 중시하였다. 고려 제17대 인종(1123~1146)의 태실이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성만리 구령산에 안치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고고학적 유물이 발견됨으로써 확인되었다. 『태장경』에 기록된 「육안태법(六安胎法)」은 당나라 현종대 고승인 일행선사(一行禪師)가 고안한 태 처리 방식이다. 『태장경』은 현전하지 않지만, 「육안태법」의 핵심 내용이 1450년 9월 8일 풍수학에서 왕세자의 태를 옮길 것을 청하면서 그 근거로 제시하는 과정에서 기록으로 남겨졌다. 사람이 태어날 때 태로 인하여 장성하게 되고, 현명함과 어리석음, 성함과 쇠함이 모두 태에 매여 있기 때문에 태를 신중하게 다뤄야 하는데, 남자의 태는 5개월째에 묻고, 여자의 태는 3개월째에 묻도록 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태를 묻는 관습이 신라와 고려 사이에 시작되었으며, 중국에는 없는 조선 고유의 풍습이라고 여겼다. 조선시대에도 태를 불에 태워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태를 묻을 때에는 가산(家山)에 묻도록 하였다. 이와 달리 왕실에서는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등 전국적으로 태를 묻기에 좋은 땅을 미리 선정하여 두었다가 왕자녀의 태실을 조성하였다. 중국 명나라 때 왕악이 지은 『왕악산서(王嶽産書)』의 ‘태를 묻는 방법[藏胎衣法]’은 1434년(세종 16) 내의원에서 발간한 산서인 『태산요록(胎産要錄)』에도 그대로 인용되어 조선 왕실의 태 처리 방식에 영향을 주었다. “태를 깨끗한 물로 씻고, 또 청주로 다시 씻어 동전 하나를 넣어 새로 만든 병에 넣고 깨끗한 비단으로 싸서 뚜껑을 덮어 봉하여 안치하였다가 3개월을 기다려 좋은 땅을 택하여 깊이 묻어야 한다.” 태를 묻기에 좋은 땅으로는 볕이 잘 들고, 높고 고요한 곳이 선호되었다.

현황

1960년대 이전 각 지역별 출산 관행과 태 처리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인들이 태를 처리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한국 사회에서 병원 출산이 보편화되기 시작하는 1980년대 이전까지 한국인들은 태를 불에 태우거나, 물에 띄워 보내거나, 땅에 묻었다. 세 가지 태 처리 방식 가운데 태를 불에 태우는 방식을 가장 선호하였으며, 태를 땅에 묻는 방식은 지역별, 계층별로 상당히 제한된 사례에 적용되었다.

의의와 평가

한국인의 장태 문화에는 자궁 속 태아를 길러 내었던 태를 소중히 여겼던 전통시대의 생명 사상과 태와 태 주인의 운명을 동일시하여 태를 잘 처리하면 태 주인의 미래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전통적인 믿음 체계가 잘 나타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문종실록』
『태산요록(胎産要錄)』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 24·25(산속편 상·하권)(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3, 1994)
「조선시대 태실에 관한 고고학적 연구」(심현용,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5)
「조선시대 출산과 왕실의 ‘장태의례’─문화적 실천 양상과 그 의미」(김지영, 『역사와 세계』 45, 2014)
집필자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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