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37 지리지 마지막 부분에 동해통, 북해통, 해남통, 염지통, 북요통 등 교통로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오통(五通)이라고 부르는데 이름 외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9주5소경을 설치하였다. 각 주의 치소와 소경 등을 왕래하는 교통로도 같이 정비되었다. 그 중 북요통은 서라벌에서 신라의 북쪽 국경지대를 왕래하던 교통로였다.
북요통이란 이름은 '북쪽으로 요역과 군역을 위해 가던 길'이란 의미로 추정된다. 고구려 멸망 후 나당전쟁을 거치면서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루었다. 675년 당군이 철수하면서 나당전쟁은 일단 종식되었지만 일종의 휴전 상태나 마찬가지였다. 신라와 당은 여전히 긴장관계를 유지하였고 당의 재침도 염려되었다. 이후 당과의 관계가 안정되었지만 발해가 등장하여 신라 말까지 여전히 국방상 중요성은 변하지 않았다. 신라는 이에 대비하여 한주를 중심으로 방어시설을 정비하고 군사력을 집중하였다. 신라인들은 북쪽 국경지대로 군역과 요역을 위해 왕래하였다. 서라벌(경주)에서 북경 지대까지 가장 빠른 길은 중원소경(충주)과 북원소경(원주) 및 한주의 치소인 서울 지역과 삭주의 치소인 춘천을 거쳐서 가는 것이었다.
신라는 통일 전부터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하여 소백산맥을 관통하는 교통로를 개척하고 활용하였다. 계립령(조령)과 죽령을 통과해서 한강 유역에 이르는 교통로는 6세기 후반 무렵이면 정비가 완료되었다. 통일 후 이것을 모두 북요통으로 개편하여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길은 이후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간선 교통로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