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산성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승암산에 있는 통일신라 시기에 축조된 성곽이다. 평면 형태는 자연지형을 활용·축조하여 부정형을 이룬다. 서쪽·북쪽·남쪽 성벽 모퉁이는 뻗어 나간 능선을 따라 성벽이 돌출되어 있다. 문터는 동문지, 북문지, 서문지 등 3개소가 있다. 다른 산성에 비해 규모가 크며, 건물지의 수가 많고 대형 건물지도 많다. 통일신라 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후백제 견훤이 궁성·방어성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일반적인 산성으로 활용하였다. 동고산성은 시기에 따른 변화상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가치가 큰 유적이다.
전주시 동쪽에 있는 승암산에 위치하고 있어 승암산성이라고도 부른다. 동고산성이란 이름은 고남산에 위치한 전주 남고산성에 대비하여 붙여졌다. 평면형태는 자연지형을 활용하여 축조하여 부정형을 이룬다. 성벽 서쪽, 북쪽, 남쪽 성벽 모퉁이는 뻗어나간 능선을 따라 성벽이 돌출되어 있어 특이하다. 능선이 이어져 있어 적의 접근이 쉬운 곳인데 방어력을 강화하기 위해 성벽을 돌출시킨 것으로 보인다. 문터는 동문지, 북문지, 서문지 등 3개소가 있다. 이중 서문지가 동고산성의 정문(주출입구)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숙종대 기록인 「전주성황사중창기(全州城隍祠重創記)」에는 동고산성 성황사터를 후백제를 세운 견훤왕의 궁성터라 기록하였다. 1980년 전주성(全州城)이란 글자가 새겨진 연화문 막새기와가 여기서 발견되었다. 이후 이것을 근거로 견훤왕궁터로 비정하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견훤왕궁터와 관련성을 규명하기 위해 1990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어 2014년까지 7차에 걸쳐서 건물지, 성벽, 문지 등이 차례로 조사되었다.
동고산성이 처음 축조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된다. 신문왕대 완산주 설치 후 치소성으로 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2014년 서문터와 서벽 일부 발굴조사에서 후백제시대에 성벽이 대대적으로 수축되었던 근거가 발견되었다. 이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통일신라에서 처음 축조하였고 이후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 후 대대적으로 수축하여 왕도의 방어성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한편, 서문지는 후백제시대에 활용되다가 고려 초기에 폐기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후백제의 유사시 왕성에서 고려시대에는 일반적인 산성으로 위상과 활용에 변화가 있었던 사정을 보여준다.
추정 견훤궁지는 산성의 중앙부에서 동쪽으로 형성된 계단상의 대지 앞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전면 22칸 측면 3칸 총 66칸 규모이며 단일건물로는 유래가 없을 정도로 크다. 여기에서는 ‘전주성’명 막새기와 ‘관(官)’자명, ‘천(天)’자명 등 글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글자가 새겨진 기와는 관아나 군사 시설에 사용되었다. 이것들과 같이 출토된 평기와들도 신라말에서 고려 초에 제작된 것들이었다. 이 건물터 외에도 다른 큰 건물터들이 성벽의 남쪽을 따라 줄지어 발견되었다. 그 중 제 7건물터는 정면 16칸, 측면 4칸 등 대형건물터였다. 여기에서도 역시 ‘관’자가 새겨진 기와도 다수 출토되었다.
성벽조사에서는 최소 2차에 걸쳐서 성벽이 축조되었던 것이 확인되었다. 1차 성벽은 판석형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조사자는 이것이 신라 신문왕대 완산주 설치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차성벽은 방형과 장방형의 형태로 잘 다듬은 화강암계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하였다. 축조시기는 9세기 중반 이후로 후백제와 관련될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문지는 서문지가 조사되었다. 서문지의 폭은 약 630㎝로 추정되는데 폐쇠된 상태로 출토되어 정확한 구조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문기둥 밑에 박았던 화금(신쇠)이 출토되어서 문지로 사용되었던 근거가 되고 있다.
동고산성은 규모도 다른 산성에 비하여 크고 건물지의 수도 많으며 대형건물지가 많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산성의 규모가 확대되고 산성 내 대형기와건물지가 등장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신라가 통일한 이후이다.
동고산성은 신라시대 지방통치의 거점으로 축조되었다가 후백제시대 궁성이나 도성의 방어성으로 수축되어 활용되었던 성으로 추정된다. 아직 발굴조사가 제한적으로 진행되어 정확한 성격을 밝히기 위해서는 조사와 연구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산성의 규모가 크고 내부에서 다수에 건물지가 발견되었다.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변화상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 가치가 큰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