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남고산성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동서학동의 고덕산 정상부에서 중복에 걸쳐 삼태기식으로 축조된 석성이다. 산성의 축성 연대는 기록에 없다. 발굴 조사도 극히 일부만 이루어져 정확한 축조 시기를 알기 어렵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 고덕산 석성이라 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폐성된 것으로 나온다. 『국조보감』에는 순조 13년(1813)에 전주부에 남고산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다. 전주의 요해처에 해당되어 관찰사 이상황이 순조 11년(1811)에 증축하기 시작해 이듬해 관찰사 박윤수(朴崙壽)가 완공하였다.
전주 남고산성은 해발 274m의 남고산 정상부와 그 남쪽의 계곡부를 에워싼 석성이다. 전주시의 요해처(要害處)에 해당된다. 따라서 산성의 정비 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서문지와 남벽 암문지, 그리고 남동우 성벽과 건물지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성문의 구조와 규모, 그리고 성벽의 축성법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전주 남고산성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축조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세종실록지리지』에 고덕산 석성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축조된 것만은 분명하다. 산성의 정비 복원을 위한 기초 자료를 얻기 위해 발굴 조사를 벌인 결과 축성 시기를 통일신라 때까지 소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전주에 완산주를 설치할 때 혹은 완산주가 전주로 바뀔 때 남고산성도 축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고덕산(高德山) 석성으로 등장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덕산성이 고적(古跡)조에 소개되어 있는 만큼 이 시기에는 남고산성이 이미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문헌비고』에도 이미 폐성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내에 우물 7개소와 계곡 1개가 있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국조보감』에 의하면 순조 13년(1813)에 전주부에 남고산성을 쌓고 진(鎭)을 설치하였으며, 별장(別將)을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전기에 폐성되었던 남고산성을 다시 남고진으로 재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성내에는 남고사(南固寺), 관성묘(關聖廟), 그리고 남고진사적비(南固鎭事蹟碑) 등이 남아 있다.
전주시의 남쪽 주봉인 고덕산 정상부에서 중복(中腹)에 걸쳐 포곡식(包谷式)으로 축조한 석성이다. 고덕산은 해발 274m의 산봉으로 전주시 원도심을 향해 서북쪽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 계곡을 에워싸면서 산성이 축조되었다. 따라서 동남쪽이 높고 서북쪽이 낮은 지형으로 되어 있다. 둘레가 2,950m에 이르는 대형 산성이지만, 그 축성 시기나 축성 목적과 관련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는 실정인데, 정비 복원을 위해 1991년에 서문지와 남벽의 암문지가 발굴 조사된 바 있으며, 지금은 모두 복원되어 있다. 2015년과 2016년에는 산성의 남동우 구간 성벽과 그 성벽에 붙어 있는 건물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성벽이 초축 이후 한 번 수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초축 성벽은 성벽 최하단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안으로 얼마간 들어간 다음, 성벽에 대한 축성이 이루어졌다. 성벽은 정연하지는 않지만 정사각형으로 가공한 성돌을 이용하여 바른층쌓기 한 것으로 밝혀졌다. 초축 성벽 위에 남아 있는 수축한 성벽은 초축 성벽보다 더 엉성한 형태로 남아 있다. 성돌과 성돌 사이에 틈새가 벌어져 있고, 그래서 쐐기돌을 박아 틈새를 메우고 있다. 수축한 성벽 위쪽에는 너비 110㎝ 크기로 여장의 기저부가 남아 있으며, 그 안쪽에는 답도(踏道)도 있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산성으로 알려져 있지만, 발굴 조사를 통해 통일신라 때까지로 소급될 가능성이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신문왕 5년(685)에 완산주를 설치할 때나 경덕왕 16년(757)에 완산주를 전주로 고칠 때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전주에서 남원으로 통하는 길을 통제하기 위해 축조한 것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