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실록자는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인쇄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제작한 목활자(木活字)이다. 강원도 등에서 황양목(黃楊木)을 옮겨와서, 1652년 2월부터 활자의 각자(刻字)에 착수하여 1653년(효종 4) 6월에 완성된 목활자를 지칭한다. 이 목활자의 규격은 대자(大字) 1.5×1.6cm, 소자(小字) 1.4×0.8cm (세로×가로) 정도의 크기이며, 글자체는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글씨체로 주성(鑄成)한 경오자(庚午字, 1450)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만들어진 목활자이다.
인조실록자(仁祖實錄字)는 『인조실록(仁祖實錄)』을 인쇄하기 위하여 특별하게 제작한 목활자(木活字)이다. 이 목활자의 재료는 황양목(黃楊木)으로 강원도 산지(産地)에서 대규모로 옮겨 왔다. 1652년 2월부터 실록청(實錄廳)에서 활자의 각자(刻字)에 착수하여 1653년(효종 4) 6월에 완성되었다. 인조실록자는 금속활자 경오자(庚午字)를 자본(字本)으로 하여 목활자를 조성(雕成)함으로써 조선 초기 금속활자 인쇄본의 전통을 목활자로나마 계승해 보려는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경오자의 글자체는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의 글씨체로 활자의 규격은 대자(大字) 1.5×1.6cm, 소자(小字) 1.4×0.8cm(세로×가로) 정도의 크기이다.
『인조실록』은 인조(仁祖, 1595~1649)가 승하한 다음 해인 1650년(효종 1) 8월 1일에 전 왕대(前王代, 인조)의 실록을 편찬하라는 왕명(王命)에 따라, 춘추관(春秋館) 안에 실록청을 설치하고 편찬에 착수하여 1653년 6월에 완성된 실록이다. 『인조실록』은 인조실록자 목활자로 1653년(효종 4)에 인출(印出)하였는데, 당시의 실록찬수청(實錄纂修廳)이 마련한 의궤(儀軌)에 따르면, “이 실록에 사용한 목활자는 교서관(校書館)에 보관하고 있던 종래의 목활자와, 인쇄에 필요한 활자 중 궐자(闕字)와 보자(補字)를 새로 만들기 위하여 황양목을 강원도 등에서 많이 가져오게 하고, 또한 각자장(刻字匠)도 여러 곳에서 많이 징용하였다.”라고 한다. 이로 보면 인조실록자는 대대적으로 목활자를 새로 만들어 충용(充用)하였던 활자를 지칭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인조실록자는 『선조실록(宣祖實錄)』을 찍은 활자보다 약간 더 크고 경오자체(庚午字體)의 필의(筆意)를 보여주는 글자체인 점에서는 종래의 실록자(實錄字) 목활자보다는 한 단계 나아간 특징을 보인다.
조선시대 실록목활자(實錄木活字)의 조성사(雕成史)를 살펴보면, ‘실록목활자’란 임진왜란으로 그 일부가 소실(燒失)된 사고(四庫)의 실록을 재간(再刊)하기 위하여, 16031606(宣祖 39)년 사이에 복각(伏角)한 조선 전기 13대까지 왕들의 실록(實錄), 광해군 초(光海君初)에 인출된 『선조실록』, 효종 초(孝宗初)에 인출된 『인조실록』, 현종(顯宗, 在位 16591674) 초에 인출된 『효종실록(孝宗實錄)』을 찍기 위하여 각각 각성(刻成)된 목활자들을 통틀어 지칭한다. ‘인조실록자’도 실록 목활자 중의 하나에 속하는 목활자이다.
효종(孝宗, 16191659)이 승하한 후에 편찬한 『효종실록』(1661년 2월 인출 완료)을 인쇄할 때 또한 많은 목활자를 보각(補刻)하였는데, 이때 보각한 목활자를 효종실록자(孝宗實錄字, 1660년 제작)라고 지칭한다. 효종실록자는 필서체(筆書體)로 각자(刻字)한 목활자로, 선조실록자(宣祖實錄字)나 인조실록자(仁祖實錄字)에 비하여 자체(字體)가 해정(楷正)하여 그 인본(印本) 또한 체재(體裁)가 훨씬 정돈되어 있다고 평가된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16세기 말부터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목활자를 제작하여 각종 도서를 인쇄하면서, 17세기에 여러 차례 제작된 실록자 목활자의 기술도 발전하기 시작하여, 교서관필서체자(校書館筆書體字, 1648, 1688) 등을 거치면서 보다 진보하였고, 정조(正祖, 17521800)의 문예 부흥 정책에 힘입어 제작된 생생자(生生字, 1792) 목활자의 제작 수준은 그 정점(頂点)에 이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