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민정부는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명명된 정부 명칭이다. 군부 출신 대통령 시대를 끝내고 민간 정치인이 집권한 정부를 의미한다. 문민정부는 군부에 대한 문민 통제를 확립해 독재로 회귀할 가능성을 없앴고, 일제 잔재 청산을 위한 역사바로세우기 사업을 추진했으며, 금융실명제와 공직자 재산공개제도로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 개혁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이후 아이엠에프(IMF) 외환 위기를 불러온 역사적 오점을 남겼다.
1992년 12월 18일 김영삼 대통령 당선을 통해 출범한 문민정부는 1993년 2월 25일 출범해 1998년 2월 24일에 완료되었다. 1987년 민주화로 군사 정권은 종료되었지만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가 당선되면서 군부 출신의 정부가 32년간 지속되었다. 문민정부에서 ‘문민’은 직업 군인이 아닌 일반 국민을 뜻하므로, '문민정부'는 군인 출신 정부에서의 전환을 의미한다. 김 대통령은 부정부패 척결, 경제 활성화, 국가 기강 확립 등 3대 국정 당면 과제라는 개혁 방향을 제시하고 신한국 건설을 국정 목표로 천명하였다. 문민정부의 주요 개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문민정부 초기에는 전환기적 정의를 실현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전환기적 정의란 과거 독재정권이 저지른 인권 침해를 인정하고 주1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책임자에 대한 처벌과 희생자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 사회 정의를 세우고 인권을 보장함으로써 국가 건설과 사회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문민정부는 일제강점기와 주2에서 벌어진 인권 침해와 적폐에 대해 전환기적 정의를 실현하고자 최우선 과제로 ‘ 역사바로세우기’를 천명하였다.
‘역사바로세우기’는 일제강점기 시기의 역사를 바로 잡는 것부터 시작되었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임정 주3들의 유해를 봉환하고 상해 임시정부와 중경 임시정부 등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를 복원하였고, 1995년 8월 15일에 일제강점기의 상징인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하였다.
민주화 주4을 계승한 문민정부는 군사 정권 잔재 청산과 군부에 대한 민간 통제를 추진하였으며, 신군부의 잔재인 주5를 해체하고 하나회 출신 군장교들을 축출하였다. 또한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여 12·12 군사반란과 5·17 군사 쿠데타와 같은 헌정 질서 파괴 행위에 대해 처벌하였다.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 노태우가 군사 주6와 부정부패 혐의로 역사적 단죄를 받았다. 남북한 대치로 가장 군사화된 국가에서 군부정권을 단죄하고 군부에 대한 문민 주7를 확립한 것은 문민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평가된다.
문민정부는 국정 당면 과제 중 하나인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금융실명제(이후 실명제)와 공직자 재산 주8이라는 개혁 정책을 실시하였다. 문민정부 초기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모든 금융 거래를 실제 거래 당사자 본인의 이름으로 하도록 하는 실명제를 실시하였다. 가명이나 차명으로 이루어지던 금융 거래로 인해 부정부패가 쉽게 발생할 수 있었고 지하 주9가 번창하여 계층 간 소득과 조세 부담의 불균형이 더 심화되었다. 부패 차단과 과세의 형평성을 높이기 위해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를 발동하여 실명제를 전격적으로 시행하였다.
실명제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 되풀이되는 대형 금융 주10로 시작되었지만, 한국의 경제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미뤄져 왔다. 실명제가 시행된 이후 예금의 실명 확인율이 90%를 넘어 실명제가 정착되어 가고 있었으나 1997년 초에 경기가 침체되고 1997년 말에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정부는 실명제 보완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실명제는 많이 퇴색하게 되었다.
공직 주11의 부정부패 척결을 위해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과 가족의 재산을 가장 먼저 공개하며 공직자 재산등록공개제도를 추진하였다. 여야 합의로 1993년 5월 20일에 「공직자윤리법」을 제정하여 3만 3천 명의 고위 공직자들이 재산을 공개하게 되면서 제도화에 성공하였다.
부정부패 근절과 정치 및 공직의 투명성 강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가 시행되었다. 위에서 언급된 공직자 재산공개제도도 공직 사회의 비리 근절 및 투명한 공직 문화 정착을 위해 실시되었다.
1994년 3월 4일 여야는 「통합선거법」, 「지방자치법」, 정치 자금 등과 관련된 「정치관계법」을 개정하였다. 「통합선거법」은 먼저 입후보자의 자원봉사자가 선거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다양한 대중 매체를 이용한 선거 운동도 할 수 있도록 해 선거 운동 행위자와 방식의 자유를 확대하였다. 돈이 많이 드는 선거를 막기 위해 선거 기간을 단축시키고 선거 비용 제한액도 축소하였으며, 선거 비용에 대한 엄격한 통제 장치를 마련하였다. 주12를 위해 언론 기관과 공무원에 대한 공정 보도 의무와 중립 의무를 선언하도록 하는 등의 제도적 장치도 강화하였다. 정치자금제도는 정치 자금의 양성화, 수입 · 지출 회계의 엄격화 등에 초점을 맞춰 개정되었다. 정치 자금 투명성 확보를 위해 정치 자금의 수입 · 지출 내역 등을 누구든지 열람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이의 신청 규정을 신설하였고 불법 정치 주13 수수 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였다.
지방자치단체장을 포함한 기초 주14, 기초 주15, 광역 주16, 광역 주17 등 4대 지방선거의 동시 실시를 골자로 하는 「지방자치법」이 통과된 후 1995년 6월 27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실시되어 주민들이 직접 뽑을 수 있게 되었다. 민선 지방자치를 부활시켜 지방 분권 시대를 연 것은 문민정부의 정치 분야 주요 업적으로 평가받는다.
문민정부는 국내 경제 구조를 개선하고 국제 경제와의 통합을 통해 경제 활성화를 촉진하고자 하였다. 1994년 말 김영삼 대통령은 ‘시드니 주18’을 통해 새 국가 전략으로 ‘세계화’를 제시하였다. 세계 중심 국가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세계 질서를 확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국제 사회와의 협력을 강화하여 모든 부문이 세계화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각 분야별 세계화를 위한 추진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추진 위원회는 대내적으로 규제 완화를 추진하여 대외적으로 금융 및 자본 분야를 적극적으로 개방하고자 하였다. 1993년 12월 ‘우루과이라운드’ 협정을 타결 지었으며, 19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WTO) 체제의 회원국으로 동참하고, 1996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 가입해 국제적 시장 개방을 통한 세계화와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1995년 10월, 한국 경제는 역사상 처음으로 수출 1천억 달러를 돌파하였고, 1996년 말에는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어섰다. 그러나 문민정부 말기에는 무역 주19가 심해지고 경제 성장이 둔화되면서 과다 주20과 과잉 투자한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의 대기업이 연이어 파산하였다. 동남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무분별하게 외화를 차입한 금융기관과 기업에 대해 해외 금융기관이 부채 상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한국의 외환 보유액이 고갈되었다. 이에 1997년 11월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International Monetary Fund: IMF)에 구제 주21을 요청해 대외 채무 지불 유예를 겨우 피할 수 있었다. 문민정부는 OECD 가입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최소화하기 위한 사전 준비를 하지 못한 채 무리한 시장 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한 결과로 IMF 외환위기를 초래하였다고 비판받았다. 이런 문민정부에 대한 비판은 1997년 12월 있었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였고, 결국 야당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최초로 여 · 야의 평화적, 수평적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
문민정부는 최초의 민간인 정부로 전환기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였고 군부에 대한 문민 통제를 확립해 독재로 회귀할 가능성을 없앴다. 또한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주의 제도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문민정부는 군부 세력인 노태우 정권과 타협한 결과물, 즉 3당 합당을 통해 이뤄져 기본적인 한계를 가지고 출발하였다. OECD 가입과 금융 개방과 같은 준비가 안 된 세계화 정책은 외환위기를 불러와 IMF의 경제 관리 하에 강도 높은 긴축 주22을 실시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또한 각종 대형 참사와 김영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의 뇌물 수수 등 각종 공직자 비리 논란까지 불거지면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하며 불명예스럽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