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1432년(세종 14) 음력 7월에 세종(世宗, 1397~1450)이 경연(經筵)에서 달력을 만드는 방법인 천문 역법(天文曆法)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때 천문 역산(曆算)에 필요한 천문 관측 기기를 갖추는 것이 정해졌다. 이러한 계기로 간의대(簡儀臺)를 건설하고 15가지의 천문 관측 기기를 제작하기 시작하였고, 1438년(세종 20) 음력 1월에 천문 관측 기기를 만드는 업무가 종료되었다. 이 기간에 창제된 물시계는 보루각루(報漏閣漏) 자격루(自擊漏, 1434), 흠경각루(欽敬閣漏) 옥루(玉漏, 1438), 행루(1437)가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따르면, 행루는 흐린 날에 시각을 알고자 만들었다고 한다. 행루는 궁궐이나 한성부(漢城府) 내가 아니라, 평안도(平安道)와 함길도(咸吉道)의 변경 지역인 도절제사(都節制使)의 군영(軍營)에서 설치하여 시각을 알려주었다. 또 평안도의 강계군(江界郡), 자성군(慈城郡), 여연군(閭延郡), 의주군(義州郡)과 함길도의 경원군(慶源郡), 회령군(會寧郡), 종성군(鍾城郡), 공성군(孔城郡) 등에도 행루를 보냈고, 서운관(書雲觀: 觀象監) 관원이 파견되어 그 사용법을 교육하였다.
또한 한성 밖의 지방에서 나라 제사를 지낼 때에도 행루를 사용하였다. 일례로 평양에 있는 집경전(集慶殿)에도 행루[漏刻]을 설치하였다. 지방의 중사(中祀) 이상의 제사에, 서운관 관원은 행루를 가지고 가서 시각을 알려주기도 하였다.
행루는 크기가 작고 구조도 단순하다. 그 구조는 파수호(播水壺)와 수수호(受水壺)가 각각 하나씩인데, 파수호에서 갈오(渴烏, siphon)를 사용하여 수수호로 물을 댄다. 파수호와 수수호는 실제 같은 크기의 물통으로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높은 위치에 놓은 물통이 파수호의 기능을 수행한다. 파수호의 물이 수수호에 다 채워지면, 두 물통의 위치를 서로 바꾼다. 즉 물이 빈 파수호는 수수호 자리로 내려가고, 물이 찬 수수호는 파수호 위치로 올라간다. 두 물통의 교체는 자(子) · 오(午) · 묘(卯) · 유(酉)의 시각에 이루어진다. 즉 오늘날 시각으로 대략 6시간마다 파수호와 수수호를 교체하여 서로의 역할을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