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수형교환소는 일제강점기, 어음을 교환하고 금융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경성에 세운 기관이다. 1910년 7월에 서울에 설립했다. 당시 은행 간 발급한 어음의 교환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비용을 절감하고자 서울에 설치하였고 이후 경제 규모가 큰 대도시로 확대하여 설치되었다. 특히 새로 설립한 수형교환소에서는 전근대 조선에서 사용하던 어음과 조선의 은행에서 사용하던 어음의 교환을 저지하고 일제가 발행한 신식 어음만을 교환할 수 있도록 조치하여 일제의 조선 내 자본 침투가 유리하도록 조선의 자본 시장 질서를 재편하고자 시도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일제는 재정 개혁을 단행하고 화폐개혁(貨幣改革)을 통해 전통적 자본 시장을 무력화하고자 시도했다. 특히 조선에서 일제에 유리한 새로운 화폐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1905년 9월, 어음 교환을 제한하는 「수형조합 조례」 및 「약속수형 조례」를 공포하였다. '수형(手形)'은 어음의 일본식 표기로 새롭게 일제가 유통하고자 하는 어음이다. 경성에 설립한 어음 교환서에서는 조선에서 유통하고 있던 어음의 사용을 금지하고, 일본 금융기관에서 발행한 신식 어음만을 유통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경성을 시작으로 평양, 대구, 진주 등지에 어음 조합을 설치하여 종래 조선의 화폐 질서 대신 일제에 유리한 자본 시장으로 조선의 자본 시장을 재편하고자 했다.
경성수형교환소는 기본적으로 금융 거래 시 은행에서 발급한 어음을 교환하여 자금의 순환을 순조롭게 하는 기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금융기관 사이에 과도한 경쟁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고 조정을 통해 금융기관의 기능을 보전하고자 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경성수형교환소에서는 어음의 교환이라는 기본적인 업무 외에도 당시 조선의 금융 전반에 걸친 통계를 확보하고 『금융통계』를 발행하였다. 이 통계에서는 당시 조선의 주요 도시인 경성, 인천, 부산, 평양, 원산, 군산, 목포 등의 예금 및 대부 이자율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였다.
개항기(開港期) 이후 조선에는 전근대에 유통되었던 상평통보(常平通寶)와 백동화(白銅貨), 일본 화폐 등이 자본 시장에서 동시에 유통되었다. 아직 일제가 의도한 자본 시장 잠식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못한 상황에서 일제는 일본 화폐와 어음의 유통만으로 자본 시장을 통일시켜 자본시장의 장악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1905년 9월 30일에 '종래의 폐습(弊習)'을 없앤다는 목적으로 아무런 과도적인 조치 없이 당시 조선에서 사용되었던 어음의 발행을 금지했던 것도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경성수형교환소는 이러한 일제의 의도에 따라 설립되었고 이후 일제는 수형교환소를 전국의 대도시로 확대하여 설치하였다.
일제는 화폐개혁과 더불어 어음 또한 일제가 발행한 어음으로만 한정하여 사용하도록 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자본 흐름과 기반을 침식시키고자 노력했다. 경성수형교환소는 일제의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일제의 금융 질서를 통해서만 자본이 유통되게 하기 위한 목적의 기관이다. 일제는 조선의 자본 시장을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경성수형교환소와 그밖에 대도시에 설치한 수형교환소를 통해 확립하고자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