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면북양(南綿北羊)은 1930년을 전후하여 일본이 전시 체제(戰時體制)로 접어들면서 당시 전시 물자로 중요하지만, 수입에 의존하던 면화와 양모를 확보하기 위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면화와 양모의 집중 생산에 돌입하고자 세운 계획이다.
일본에서 필요로 하는 면화와 양모의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일본은 이 두 품목을 조선에서 수탈(收奪)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고 계획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滿洲事變)이 발생하고 준전시 체제에 돌입한 이후, 한반도의 남쪽에는 면화, 북쪽에는 양모 생산을 독려하여 일본의 군수 물자 수요를 충당하고자 하였다. 면양의 경우, 일본의 자국 내 생산이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면양을 위해 필요한 목초지가 부족했다. 특히 한반도의 북쪽이 양을 키우기 적당한 초지가 많았고 기온이 한랭하고 강우량이 적어 양을 키우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하여 집중적으로 양모를 생산할 장소로 한반도의 북쪽을 선택했다. 다음으로 면화는 전근대(前近代) 시기 조선에서 이미 일년생 면화가 재배되고 있었고 쌀과 함께 국가 재정으로 널리 활용되고 있었다. 한반도의 남쪽에서 면화가 재배되고 있었던 것을 활용하기 위해 일제는 남쪽을 면화 재배 지역으로 특화하고자 했다.
전시 체제에 돌입한 일제는 군수에 활용할 면화와 양모를 조선에서 수급하기 위한 정책을 지역에 따라 적용해 생산량을 증대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특히 우리나라를 양모 생산지로 추진한 것은 양모가 군수용으로 활용되었지만, 각국에서 수출 금지 품목으로 정해지면서부터였다. 이에 일본도 1917년에 임시 산업 조사국을 설치하여 군수로 활용될 양모 자급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으로는 1918년부터 25년 간 100만 두의 면양을 증식시켜 양모를 획득할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조선도 포함하여 추진되었으며,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면양 30만 두의 증산 계획도 병행해서 추진했다. 그러나 1924년, 기후 조건 등을 이유로 생산량이 늘지 않자 조선에서의 면양 증식 계획은 폐기되었다. 면양 정책이 재추진된 것은 계획이 폐기된지 10년 만인 1934년이었다. 대공황 이후 보호 무역 체제 아래에서 일본 역시 수입품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면화와 양모를 자급하여 보호 경제 속에서 부족한 면화와 양모를 자급하고 이를 계기로 경제 공황(經濟恐慌)을 극복하고자 시도했기 때문이다. 면화의 경우 1920년대에 이미 국제 가격의 하락 등으로 부진함을 면치 못하였지만, 일제가 필요로 한 면화를 무역 마찰 때문에 인도로부터 공급받지 못하면서 더욱 부족량을 채울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에서 생산되는 면화로 부족량을 충당하고자 조선에서의 면화 생산량 증대를 정책적으로 시도하였다.
1930년대에 각국의 보호 무역 주의가 강화되면서 일본은 동아시아권역에 분리되어 수입에 의존했던 면화와 양모를 전시를 대비하여 비축하고자 조선을 그 생산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적절한 기후와 제반 조건의 미비로 일제의 계획과 달리 조선에서 면화와 양모의 생산량은 목표량을 채우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과도한 수급량 할당으로 인해 조선에서의 농민들은 고통을 받았고 농촌의 산업 구조는 일제의 계획에 따라 왜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