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태수 선생 유물(張泰秀 先生 遺物)
나라가 망한 뒤 일제가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은사금을 전달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마침내 일본 헌병대가 세 아들을 잡아가고 그를 체포하려 하자 1910년 음력 11월 11일에 조상의 사당에 통곡으로 고별하고 단식에 들어갔으며, 단식 중에 “고대한동포문(告大韓同胞文)”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27일 만인 1910년 음력 11월 27일 향년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물로는 영정(影幀), 금관(金冠), 소관(小冠), 각대(角帶), 발막(黑布), 조복(朝服: 內衣), 후수(後襚), 호패(戶牌), 홀(笏), 패도(佩刀), 원선(遠扇), 어사화(御史花), 동상(궤포함), 교지(敎旨) 35점(각 品階別), 칙지(勅旨), 칙명(勅命), 첩(帖) 등이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 상신리 장방호(張方浩)가 소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