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익(閔泳翊)
그리고 군란 진압 후 박영효(朴泳孝)를 정사로 하는 사죄사절이 일본으로 파견될 때, 김옥균(金玉均) 등과 함께 비공식 사절로 3개월간 일본의 개화 진행 상황을 시찰하였다. 이어 권지협판교섭통상사무(權知協辦交涉通商事務)로 톈진[天津]에 파견되어 해관사무를 교섭하였다. 그리고 1881년에 신설된 통리기무아문이 1882년 외아문과 내아문으로 개편될 때, 김옥균과 같이 부교사협판(富敎司協辦)이 되었다. 1883년 5월 주한 미국 공사 푸트(Foote, L. H.)가 내한하자, 그 해 6월 이에 대한 친선사절 보빙사(報聘使)의 정사로 임명되어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곳에서 미국 대통령 아서(Arthur, C. A.)를 두 차례 만나 한글로 작성된 국서를 주며, 양국간의 우호와 교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어 세계박람회, 시범농장, 방직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