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응희(申應熙)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의 권유로 1883년 5월 서재필(徐載弼), 서재창(徐載昌), 박응학(朴應學), 정행징(鄭行徵), 임은명(林殷明), 신중모(申重模), 윤영관(尹泳觀), 이규완(李圭完), 하응선(河應善), 이병호(李秉虎), 이건영(李建英), 정종진(鄭鍾振), 백낙운(白樂雲)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 전부터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정난교(鄭蘭敎)와 합류하여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후 그해 10월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 들어가 1884년 5월 졸업했다. 1884년 7월 귀국해 8월부터 무관으로 부장(部將) 겸 사과(司果), 9월 후영 군사마(後營軍司馬), 10월 남행 군직을 역임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하면서 서재필·정난교 등과 함께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